문건에 이름이 없었다. A와 A′로만 표기되었다. 내용을 보니 누구를 지칭하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A는 이건희 회장이었고, A′는 홍라희씨였다. 현재 삼성그룹을 넘겨받은 이재용 부회장은 ‘JY’로 표기되어 있었다. 2008년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 구조본(구조조정본부) 내부 문건에서다. 김 변호사를 만나 이것부터 물었다. “왜 문건에 이름을 쓰지 않나요?” 그 자신이 구조본 일원이었던 김 변호사의 대답이 너무 싱거웠다. “구조본에서 회장님 이름을 쓰는 것도 불경죄야!” 구조본에 대한 김 변호사의 증언을 들으며, 제국이 떠올랐다. 내가 그들과 동시대를 사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황제의 말씀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2017년 이번에 또 하나의 제국을 보았다. 다른 세계를 접했다. 이번에도 이름이 없었다. ‘VIP’라고만 잔뜩 쓰여 있었다. 안종범 전 수석이 남긴 업무수첩에 대통령의 이름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400쪽에 가까운 업무수첩 어디에도 대통령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일지에도 박근혜는 ‘령’, 김기춘은 ‘장’으로만 표기되었다. 두 사람이 남긴 메모 형식과 내용을 보니 8년 전 취재했던 제국, 삼성 구조본이 떠올랐다. 아마 청와대에서도 이름을 적는 것은 불경죄인가 보다.
2주 연속 〈시사IN〉 기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지난주 1379개 ‘최순실 파일’ 입수에 이어, 지난주에는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을 단독 입수했다. A4 용지 400쪽에 가까운 분량이라 특별취재팀을 꾸렸다. 편집국 인력의 절반 가까이를 투입했다. 업무수첩에 기록된 VIP 지시를 하나하나 대조 검토했다.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에는 제국과 제국의 거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협상을 하듯 액수를 놓고 신경전을 벌인 정황도 나왔다. ‘유한 제국(박근혜·최순실)’은 자신들의 철옹성인 재단을 만들어 ‘무한 제국(재벌)’을 꿈꿨다. 무한 제국은 지원금을 몇 푼 챙겨주며, 자신들의 숙원을 해결하려 했다. 베일에 가렸던 검은 거래가 세상에 알려지자, 계약은 파기되었다. 한쪽은 상대방의 선의라 주장하고 한쪽은 협박에 따른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이 검은 거래가 단죄될지 아직 장담할 수 없다. 특검 수사도, 최순실씨 재판도 그 결말을 속단할 수 없다.
우리는 그 끝을 취재하고 기록할 것이다.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 때처럼 최순실 재판도 이번 호부터 지면 중계를 시작한다. 이번에 담지 못한,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에 담긴 팩트를 발굴해 보도를 이어갈 것이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팩트를 알리는 첫 기사가 특종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취재하고 물고 늘어지는 보도도 나는 특종이라고 여긴다. 이 검은 거래도 반드시 끝을 보고 싶다. 우리는 기록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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