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메뉴는 기억나지 않는다. 식후 커피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건너편의 1층과 2층을 모두 쓰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마셨다. 날씨가 애매해서 따듯한 커피와 아이스 사이에서 잠깐 망설였고, 아이스로 결정했다. 자리는 2층에 잡았다. 빨대 포장 비닐을 벗기고는 버리지 않고, 손가락에 휘감았다 풀었다 했다. 동행한 취재원은 청와대 근무자였다. ‘문고리’급은 아니고 ‘십상시’에는 얼추 들어간다. 그가 지인을 몇 번 마주쳐서 대화가 툭툭 끊겼다. 두 번, 아니면 세 번이다. 청와대에서 비상소집은 떨어지지 않았다. 2014년 4월16일, 낮 12시에서 1시 사이 내 기억이다.

ⓒ시사IN 양한모

특별히 충격적인 날의 기억은 특별히 생생하다. 강렬한 정서적 자극을 받는 순간, 의미 없는 디테일까지 마치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으로 남긴 것처럼 머리에 새겨진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걸 ‘섬광기억’이라고 부른다. 미국인들은 2001년 9월11일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주 쉽게 떠올린다. 9·11 테러가 있던 날이다. 이게 꼭 정확하지는 않다. 인지심리학자들이 9·11 테러 직후의 기억을 수집해 시간 경과에 따라 추적한 결과, 섬광기억에도 오류는 제법 나왔다. 하지만 조사 대상자는 세세한 장면까지 자신만만하게 증언했다. 그 순간을 어떻게 잊겠냐면서.

“대통령이 여러 결재를 많이 하고 바쁘셨기 때문에 정확한 기억을 잘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억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12월3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대리인단이 기자들에게 세월호 7시간 행적 관련 질문을 받고 한 말이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박 대통령에게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을 빠짐없이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헌재는 “워낙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대부분 국민은 그날 무엇을 했는지 기억할 수 있다”라고 했다. 심리학자라면 “부정확할 수는 있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아 이 말을 지지할 것이다.

기억이 잘못될 수는 있다. 나는 그날 어쩌면 1층에 앉아 따듯한 커피를 마시면서 빨대 포장 비닐은 그냥 내버려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각인을 지울 방법은 없다. 그날은 모두에게 그런 날이었다. 여론이 경악하자 대리인단은 말을 주워 담았다. 대통령도 설마 기억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이라면 고려해볼 만한 가설은 이렇다. 섬광기억이 형성될 만큼 강렬한 정서적 충격을, 그날 대통령은 받지 않았다. 내게는 이 가능성이,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훨씬 끔찍하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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