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정의박상규·박준영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재벌은 청문회에 나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도 ‘빨리 보내드리자’는 배려를 받는다. 하지만 이 시대 약자는 죄가 없어도 살인범으로 몰려 긴 시간 감옥에 갇힌다. 박준영 변호사는 가망이 없어 보였던 재심 사건을 맡아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을 위해 뛰었고, 박상규 기자는 이를 생생하게 정리했다. 포털사이트 ‘다음’ 스토리펀딩 역대 최고의 후원액과 후원자 수를 기록하며 화제가 된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익산 택시기사 살인 사건’ 등의 이야기가 책으로 묶였다. 이들이 재심과 무죄를 이끌어낸 시간은 죽은 정의를 살려낸 과정이었다. 법이 약자를 어떻게 대해왔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한국 사법 시스템에 경고등을 켰다.

메시팀 하포드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늘 경제 분야 독자들을 열광시키는 경제학자이자 인기 칼럼니스트 팀 하포드의 신간. 전작인 〈경제학 콘서트〉와 〈당신이 경제학자라면〉에서 보여준 탄탄한 전문성과 생생한 전달력의 조합은 신작에서도 여전하다. 차이도 있다. 경제학 안내서에 가까웠던 전작들과 달리 〈메시〉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한다. 하포드는 매뉴얼과 질서를 내다버리라고, 엉망진창과 무질서와 혼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정으로 창의적이고 예측 밖의 결과는 거기서 나오며, 인간이 인공지능에 가진 비교우위도 바로 엉망진창에서 무언가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당신의 정글 같은 책상을 비웃는 직장 동료에게 한 방 먹일 사례와 연구 결과가 가득 담겨 있다.

모던 팝 스토리밥 스탠리 지음, 배순탁 외 옮김, 북라이프 펴냄‘덕질’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결국 계보에 손을 대야 한다. 음악 애호가들에게 이 책은 적절한 길잡이다. 〈NME〉나 〈피치포크(Pitchfork)〉 같은 사이트에서 ‘2016년 베스트 앨범 50’ 따위를 뒤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구비해야 할 책이다. ‘덕업일치’ 생을 살아온 저자가 1950년대부터 2000년까지 팝의 역사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풀어낸다. 팝이라는 제한적인 장르를 다뤘지만, 50년대 이후 문화사 전반을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20세기는 문학·영화·음악·패션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영향을 미쳤던 시대다. 현존하는 모든 대중문화의 원천이 이 시기에서 비롯되었다. 두고두고 곱씹으며 읽어볼 이야기가 가득하다.

의장! 이의 있습니다제프 그램 지음, 이건 외 옮김, 에프엔미디어 펴냄한국 사회에서 주주는 주식을 매입한 다음 주가 상승만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다. 미국에서 태동한 ‘주주행동주의’의 주주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다. 다른 주주들을 규합해서 기업을 압박하거나 심지어 경영권 인수(기업사냥)로 잉여 현금을 토해내게 만든다. 경영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분을 확보한 다음 ‘그 주식들을 비싼 값에 사가라’고 경영진을 괴롭히기도 한다. 삼성그룹 이건희 일가와 맞서는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주주행동주의의 ‘투사’다. 이 책은 주주행동주의의 서막을 연 20세기 초반의 벤저민 그레이엄부터 ‘기업 인수의 달인’ 로버트 영 등 미국의 8대 ‘주주행동 사건’을 다룬다. 찬반을 막론하고 읽어둘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신해경 외 옮김, 아작 펴냄작가의 후기 대표작인 표제작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을 포함해 단편 열한 편이 수록됐다. 원서 출간 40년 만에 한국에 도착한, 수록작 모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다. 어떤 책은 너무 늦게 도착한 나머지 가장 적절한 때에 당도한 셈이 된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작품은 크게 두 파트로 묶였다. 1부 ‘사랑은 운명’에 수록된 다섯 편에서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탈출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어진 운명을 거부한 여성들의 활약을 비극적일지언정 패배적으로 다루지 않는 점이 돋보인다. 2부 ‘운명은 죽음’에 수록된 여섯 편에서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좌절하는 남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은유 지음, 서해문집 펴냄글 쓰는 사람 은유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저자는 스스로의 책을 “서른다섯부터 마흔다섯을 경유하는 한 여자의 투쟁 기록”이라고 설명한다. 은유의 이야기는, 유일무이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흔한 이야기다. “모성을 수행하는 엄마이자 존재를 이행하는 자아라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겹친다. 은유는 여성을 미치게 하는 세상과 싸우기 위해 글과 시를 잡았다. 울컥하는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받는 순간을 기록했다. 은유가 밑줄 친 문장에서 뻗어나간 이야기에 다시 밑줄을 치며 읽으면, 만난 적도 없는 시공간의 사람들이 문장을 통해 연결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