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선제 쟁취와 올림픽 개최의 환희를 맞이한 직후인 1989년은 모든 게 예전과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사람들 사이를 떠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 CF 한 편이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았다. TV 앞에 앉아 영화를 보던 새댁은 남편의 부탁을 떠올리고는 VCR의 첨단 기능을 활용해 동시에 다른 채널에서 방송 중인 축구 경기를 녹화한다. “남자는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연기를 한 당사자조차 ‘공감할 수 없었다’고 회고하는 성차별적인 카피였지만, 불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보다 ‘저 모델은 누구냐’고 묻는 목소리가 더 컸다. 시대의 그늘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려웠던, 깎아놓은 밤톨 같은 얼굴로 환하게 웃는 모델.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의 공기를 체화한 듯한 그 얼굴과 사랑에 빠졌다. 데뷔 2년차 모델, 최진실의 등장이었다.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불행한 가정사와 지독한 가난을 딛고 시대의 얼굴로 떠오른 최진실의 성공기는 마치 한국 현대사 그 자체를 압축해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동생 최진영과 함께 밀가루 반죽을 떼어 수제비를 해먹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울었고, 그럼에도 얼굴에 그늘 한 점 없이 밝고 당찬 모습을 보여주던 그에게 매료됐다. 최진실은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얼굴이었고, 한국 사회에서 인정받고 이해받고 싶었던 동시대인들은 모두 그의 얼굴을 빌렸다. 그는 갓 신혼살림을 차린 신세대 새댁이었고(영화 〈나의 사랑, 나

ⓒ덕후달려
의 신부〉), 소꿉친구에게 느끼는 연애 감정에서 오는 혼란을 일에 매진해 해소하는 커리어 우먼이었으며(드라마 〈질투〉), 변심한 남편이 고용한 킬러를 프라이팬으로 때려잡는 당찬 여자이자(영화 〈마누라 죽이기〉), 여성에게 폭력적이던 시대에 대한 복수로 당대 최고의 남자 배우를 납치한 페미니스트였다(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심지어는 IMF 외환위기 시절 벼랑 끝에 몰린 한국의 재기 의지를 상징하는 얼굴이기도 했다(기아자동차 광고). 최진실은 한국의 1990년대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남자 배우는 박중훈, 여자 배우는 최진실이라는 공식이 너무 자연스러워 우리는 그가 얼마나 거대한 스타였는지 실감도 못한 채 그 시절을 보냈다. 최진실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으면서도 저 멀리 있는 별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라 지나가다 만나면 반갑게 알은척을 해줄 것 같은 친근한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안재욱과 함께 전형적인 캔디 스토리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것부터(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김혜자와 함께 애증 어린 모녀를 연기하는 것까지(영화 〈마요네즈〉) 그 연기 폭을 다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마흔 번째 생일을 앞두고 루머에 무너져 내리다

너무 친근하고 당연한 것이 문제였던 걸까. 사람들은 최진실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알고 싶어 했고, 근거 없는 소문들을 만들어 즐겼다. 대중의 시선을 상대하며 살아야 했던 최진실은 20대 초반 이미 불면증에 시달렸고, 미술대학 진학을 준비했던 사람이 몇 년 사이 그림 그리는 법을 까맣게 잊을 만큼 ‘자연인 최진실’을 돌보지 못했다. 영화 〈마요네즈〉를 같이 작업한 윤인호 감독은 “그가 사석에서 ‘내겐 20대가 없었다’고 토로했고, ‘세트장 들어오는 시간이 제일 편하고 좋다’고 말했다”라고 회고했다. 자신은 가진 적 없었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보겠다는 꿈이 좌절된 순간, 그 ‘제일 편하고 좋은’ 촬영장으로도 돌아갈 수 없었다.

우리가 그를 조금 더 소중하게 여겼다면, 언제나 곁에 있는 사람이니 어떻게든 버텨낼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복귀 후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었던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로맨스〉를 선보였던 2008년, 그는 친구 남편의 자살에 연루되어 있다는 루머에 무너져 내렸고, 마흔 번째 생일을 80여 일 남겨두고 세상에 대한 환멸과 분노 속에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우리가 그를 세간의 억측으로부터 지켜냈다면 어땠을까. 늘 바라왔던 것처럼 김혜자나 고두심처럼 연기하며 나이 먹는 그를 볼 수 있었을까. 살아 있었다면 마흔여덟 번째가 되었을 그의 생일 2016년 12월24일을 함께 축하할 수 있었을까.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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