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디 드라마 속 재벌 2세 서사라고 해서 시대의 불안이 반영되지 않은 건 아니다. 재벌 2세 서사가 어떤 식으로 왕위 계승 서사를 빌려왔는지 살펴보자. 제 영지에 있던(유학 중이던) 왕자(재벌 2세)가 말을 달려 왕궁으로 돌아올 때에는(귀국)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부왕(그룹의 오너)은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간신들(회사 내 주인공에게 적대적인 이사들)의 말에 자꾸만 현혹되고, 백성(직원)들은 외침에 시달리거나(적대적 M&A 시도) 먹을 게 없어 주린 배를 붙잡고 운다(정리해고 위협). 왕자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백성들의 애달픈 목소리를 듣고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부왕에게 직접 간언하고 간신들을 내치고 외적을 막고 백성들을 돌보는 것으로, 왕자는 위기에 빠진 왕국을 구하고 왕위를 물려받는다. 말하자면 ‘뭔가 잘못됐다’는 본능과 ‘이대로 가다간 다 죽는다’는 위기의식이 새 시대 새로운 리더십으로 교체를 요구했고, 그것이 희미하게나마 반영된 흔적이다.

문제는 그 불안이 반영되는 방식이 왜 하필 혈통을 기반으로 한 왕위 계승 서사인가 하는 점이다. IMF 관리 체제를 전후해 재벌들에 위기가 찾아온 근본적인 원인은 오너 중심의 문어발식 경영과 방만한 몸집 불리기였다. 해외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재벌 2세들이 배운 건 위기를 근본적으로 타파할 방법이 아니라 더 효율적으로 기업을 승계해 그룹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경영 노하우보다는 통치 기술을 익혀왔으면서, 학위를 무기로 ‘단순히 자식이기에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기업을 운영할 만한 전문성이 있어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면피해왔음을 우리 모두 익히 봐오지 않았나. 그러니 새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리더십은 2세 승계보다는 차라리 오너 일가의 봉건적인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전문경영인 도입 쪽에 가까웠으리라. 그러나 일련의 트렌디 드라마 속에서 재벌 2세가 전문경영인에게 기업의 경영을 맡기고 2선으로 물러나는 식의 묘사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기업을 물려받는 걸 포기하는 주인공이 등장한 MBC 〈현정아 사랑해〉(2002) 정도를 제외하곤 별로 찾아보기 어렵다.

ⓒSBS 화면 갈무리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현빈·사진)은 타고난 감각과 판단력으로 기업을 성공 가도에 올린다.
오히려 트렌디 드라마 속 재벌 2세는 집안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호텔 지분을 인수해 정정당당하게 기획실장 자리에 오르는 능력자이거나(〈1%의 어떤 것〉(MBC, 2003)의 이재인), 실연의 아픔을 일에 매진하면서 해소하는 성실하고 선량한 워커홀릭(〈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SBS, 2007)의 유준석), 혹은 일은 안 하고 매일 노는 것 같지만 타고난 감각과 판단력으로 기업을 성공 가도에 올리는 천재적인 경영인(〈시크릿 가든〉(SBS, 2010)의 김주원)으로 묘사되곤 했다. 심지어 가난을 딛고 이 악물고 노력해 대기업에 입사한 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고, 회장으로부터 최고경영자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인물조차 ‘알고 보니 자신의 출생 비밀을 모르고 있던 재벌 2세였다(〈황태자의 첫사랑〉(MBC, 2004))’는 스토리쯤 오면 이 세계 안에서 기업의 모순을 해결할 존재는 ‘고귀한 혈통’을 물려받은 재벌 2세뿐인 듯한 폐소공포증이 엄습한다.

영민한 CEO가 평사원 출신이면 안 될까

굳이 우기자면 이것을 ‘현실 모순의 상상적 해결(프레드릭 제임슨)’이 이루어지는 한 형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재벌이 갑자기 개심해 족벌 경영 체제를 타파하고 전문경영인을 들이거나 종업원 주식 소유제를 도입해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독려할 리는 없으니, 상상 속에서나마 건전하고 영민한 CEO를 등장시켜 공정하고 정의로운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판타지. 하지만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 이 재벌 2세 판타지는 더더욱 불온해진다. 어차피 상상이고 판타지라면, 평사원들이 힘을 모아 위기에 처한 회사를 구해내고 오너 일가가 구축한 봉건적인 지배구조를 타파하는 식의 판타지가 허용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건전하고 영민한 CEO가 평사원 출신이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디 있는가.

ⓒMBC 화면 갈무리MBC 드라마 〈역전의 여왕〉의 한 장면.
그러나 트렌디 드라마는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주체로서의 재벌 2세, 왕자님을 포기하지 못한다. 구조조정본부장인 30대 초반의 재벌 2세 구용식(박시후)은 해고 위기에 처한 이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는 정의롭고 선한 역으로, 기업 내에서 여자로는 처음 임원직에 오른 한송이 상무(하유미)는 사장직을 얻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술수를 부리는 악역으로 등장한 MBC 〈역전의 여왕〉(2011)을 보라. 이토록 견고한 재벌 2세 판타지는 한국인이 재벌에 대해 가진 인식을 드러낸다.

첫째, 한국인은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재벌이 현대의 왕족이라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한국이 5~9%를 오르내리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중산층’이라 불릴 만한 계층을 두툼하게 형성한 1987~ 1996년. 재벌의 덩치를 불려준 대신 목줄을 쥔 주인으로 군림하던 군부독재 세력이 사라지자, 재벌은 직원들에게 안정적인 고용을 제공하는 대가로 스스로 권력이 되었다. 그렇기에 재벌 2세의 경영직 승계는 왕위 계승 서사 구조를 빌려오고, 형제들 사이의 경영권 다툼은 사극에 비유된다.

둘째, 한국인은 재벌의 봉건적 지배구조 해체를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재벌의 강력한 힘 때문에 그런 상상 자체가 비현실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군주제 치하 신민이 임금의 선정을 바랄지언정 군주제 자체를 뒤집어엎자는 발상을 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것과 같다. 한국인은 외국에서 선진 문물을 배워온 재벌 2세가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경영 철학을 가지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실천하는 지점까지는 상상해도, 재벌의 지배구조를 해체하는 지점까지는 쉽게 나아가지 못한다.

셋째, 한국인은 내심 재벌이 현재의 지위를 잃을까 걱정한다. 한국의 재벌은 오너 1인 중심의 족벌 경영을 통해 덩치를 불리고 제 힘을 키워왔다. 이제 와서 바꾸려다가 혹시 힘을 잃고 붕괴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재벌의 근본적인 개혁을 두려워하는 한편, 선량하고 유능한 후계자 한 명이 재벌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안전한 판타지를 소비한다. 드라마에서나 그렇지 누가 현실 세계에서 그런 식의 판타지를 소비하겠느냐고?

삼성이 경영 승계를 위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해외 헤지펀드의 경영권 위협으로부터 국민기업 삼성을 지키는 길’이라고 포장해 소액주주들의 동의를 얻은 게 2015년 5월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신비주의를 고수하던 아버지 이건희 회장과는 달리 기자들에게 신형 갤럭시 폰을 나눠주는 식의 스킨십에 능하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게 같은 해 12월이다. 아이들은 동화를 통해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배운다. ‘어른을 위한 동화’인 트렌디 드라마를 보며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반복 학습 중일까?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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