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서 황룡사 터 발굴은 문화재 조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발굴 조사단은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안압지 조사에 착수하는데, 거의 동시기인 1976년 4월 황룡사 터에도 발을 디디게 되었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이전에도 황룡사 터, 특히 구층 목탑에 대한 조사가 시도된 바 있다. 문화재위원회가 1964년, 황룡사 터 내부의 민가 한 채를 철거했던 것이다. 몽골군이 이미 700여 년 전에 불태워버렸지만 이 목탑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탑의 뿌리로 깔려 있는 ‘받침돌(초석)’들이다. 지름 1m 내외인 초석은, 사각형 형태인 목탑 바닥의 각 변에 8개씩 모두 64개가 배치되어 있다. 한 변이 22.2m로 면적으로는 약 490㎡(150평) 규모다. 탑의 높이는 80m로 추정된다. 이 사각형의 중앙에 ‘심초석(心礎石·중심 받침돌)’이 놓여 있었다. 목탑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의 뿌리다. 1964년 당시 문화재위원회가 철거한 민가 한 채는 이 심초석 위에 세워져 있었다. 민가를 치우고 나니 비로소 집채에 묻혀 있던 그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랬더니 도굴꾼이 몰려들었다. 심초석이 드러난 이듬해(1965년) 말, 도굴꾼 일당이 심초석 주변에 묻혀 있던 각종 보물을 훔쳐 달아났다. 주로 옛 탑들을 넘어뜨린 뒤 그 내부에 봉안된 사리장엄(舍利莊嚴:사리를 담는 병과 그릇, 함께 봉안된 각종 공양품 등)을 빼돌리던 자들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도굴꾼 일당은 무게 30t에 달하는 황룡사 구층 목탑의 심초석을 잭으로 들어 올린 뒤 그 안의 보물을 빼냈다. 당국도 해당 시점에는 도굴 사실 자체를 몰랐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도굴꾼들은 이듬해(1966년) 9월, 불국사 석가탑을 도굴하려다 검거되었다.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구층 목탑의 도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도굴단 부두목인 윤 아무개씨는 10년가량 국립경주박물관의 수위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병각 당시 삼강유지 사장이, 도굴한 유물을 사들인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전 회장의 형이다.
도굴꾼 몰려들어 보물 훔쳐 달아나기도
발굴단은 결국 포항제철에 요청해서 100t 크레인을 동원했다. 이에 앞서 크레인을 구층 목탑 자리까지 운행하기 위한 논길을 만들기도 했다. 1978년 7월28일, 크레인으로 심초석을 꺼내 내부를 조사하고 9월9일에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지금도 현장에 가보면, 구층 목탑 자리의 중앙에 놓인 심초석을 볼 수 있다. 당시 크레인을 위해 닦았던 논길은, 현재도 황룡사 터로 접근하는 주요 통로다.
황룡사 터는 그 넓은 면적만큼이나 각종 발굴 기록을 갈아치웠다. 불확실하게 기록된 연도를 제외하고 7년 동안 동원된 발굴 인부만 연인원 6만2483명에 달한다. 고용효과로 봐도 엄청난 발굴 사업이었다. 그런 까닭에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가운데 문화재 발굴을 경기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설명하는 이도 없지 않다. 당시 작업반장 4명 가운데 김용만·최태환씨가 생존해 있다. 이들은 발굴 작업으로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유산상을 받기도 했다.
황룡사 터는 한국 고고학계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발굴 대상 면적이 워낙 넓고 작업 기간도 길어서 고고학도를 키워내는 사관학교 같은 구실을 했다. 지금 고미술 혹은 고건축학계 중진 가운데 경주의 현장들에 가보지 않은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백제 고고학 전공인 최완규 원광대 교수도 ‘아르바이트 발굴생’으로 안압지와 황룡사 터에서 젊음을 불태웠다. “발굴하는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경주고적발굴단에서 파카를 나눠줬다. 그 파카에 경주고적발굴단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다니면 술도 외상으로 먹을 수 있었다. 그만큼 발굴하는 사람들이 신뢰받았다. 나 스스로도 ‘고고학 발굴은 이렇게 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현장이었다. 실측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모두 거기서 배웠으니까….”
당시 대학들에도 고고학 관련 학과는 설치되어 있었지만 ‘고고학 꿈나무’들을 노련한 고고학자로 키운 것은 바로 경주였다.
※이번 호로 ‘권력이 사랑한 문화재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