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말기 1896년 병신년, 백성들은 2016년의 한국인들만큼이나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단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과 세자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자기 궁궐을 버리고 외국 공사관에 몸을 의탁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지속됐으니까. 이러려고 우리가 개화(開化)를 했나 탄식했을 것이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국정농단’에 어금니를 악물었을 거야. 해가 바뀌어 1897년 정유년, 고종은 벌써 재위 35년째를 맞고 있었어. 개화의 소용돌이에다 봉건 체제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 외국의 탐욕스러운 침탈까지 겹친 격동의 세월을 보낸 임금. 과연 고종은 어떤 군주였을까?

그는 열두 살 때 왕위에 올랐어. 그런데 정환덕이라는 이가 쓴 〈남가몽〉에 따르면 자신이 왕이 됐음을 인지한 열두 살 소년은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해. “궁궐 문밖의 군밤 장수 아무개를 죽여라. 그놈은 나에게 단 한 번도 군밤을 공짜로 주지 않았느니라.” 야사(野史)의 기록이고 철이 덜 든 아이의 치기였겠지만 아빠는 이 일화에서 후일 고종이 보여준 통치 스타일의 단면을 엿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연합뉴스1897년 정유년 고종이 대한제국 제1대 황제(광무황제)로 등극했다.
1894년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자신들의 봉기를 빌미로 외세가 개입하자 스스로 해산을 선택해. 그런데 이 사려 깊은 동학 농민군을 짓밟기 위해 고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국 군대를 불러들였지. 이렇듯 고종은 그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백성보다는 외국 군대를 더 믿었고, 다스리는 나라의 이익보다는 국왕 개인의 특권을 누리는 일에 더 큰 관심을 쏟았어. 임금으로서 책임감을 지니기보다는 군밤 장수에 대한 복수를 첫 명령으로 내렸던 소년 고종처럼 말이다.

백성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고종은 1년 동안 아관파천을 끝내고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을 나서게 돼. 개화파고 수구파고 국왕이 남의 나라 공사관에서 셋방살이하는 꼬락서니가 얼마나 한심했겠니. 그 뭉쳐진 굴욕감은 환궁을 계기로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대내외적으로 제국을 선포하고 임금의 호칭도 황제로 격상시키자는 운동으로 승화돼. 왕국이건 제국이건 나라 형편은 똑같은 판에 칭제건원이란 요즘 말로 ‘정신승리’일 수도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에 호응했고 마침내 정유년(1897년) 10월12일 대한제국이 수립돼. 이제는 정말 당당한 독립국, 근대국가로 우뚝 서자는 바람의 ‘황제 폐하 만세’ 소리가 드높았지만 고종 황제가 그 환호 앞에 내민 대한제국 헌법이라 할 ‘대한국 국제(國制)’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부터 오백년간 전래하시고 이후부터는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제 정치이니라(제2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을 향유하옵시느니 공법(公法)에 이르는바 자립 정체이니라(제3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시는 군권을 침손할 행위가 있으면 그 행위의 사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어버린 자로 인정할지니라(제4조).” 그렇게 황제는 백성의 염원과 역사의 순리를 동시에 거부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대한국 국제 아래의 대한제국은 〈경국대전〉을 내세운 조선 왕조보다도 후퇴한 전제군주제였으니까. 1897년 정유년은 희망으로 부풀었으나 나라님은 희망이라는 풍선의 김을 빼버렸다.

1897년으로부터 1020년 전 정유년, 형편없이 기울어가던 신라의 변방, 송악이라 불리던 오늘날 개성 지역 호족 왕융의 집에 아들이 태어났어. 이름은 왕건. 후일의 고려 태조 왕건이다. 그가 살아가던 세상은 그야말로 난세였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이나마 한 국가의 울타리를 유지하며 살던 한반도 사람들은 다시 후삼국으로 갈라섰고, 서로 죽고 죽이는 혈투를 치렀지. 태봉의 궁예 같은 사람은 신라를 증오한 나머지 신라에서 항복해오는 사람들을 죽여버렸다고 했고,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기습해 국왕을 자살하게 하고 그 왕비를 성폭행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은 너도 알고 있을 거야.

‘타도’하고 ‘근절’하고 ‘격멸’하지 않고도

왕건은 폭정을 일삼던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긴 했지만 견훤 같은 전쟁의 명수도 아니었고 미륵을 자처하던 궁예처럼 카리스마가 넘치지도 않았어. 그의 무기는 포용력이었단다. 왕건은 아무리 험악하게 싸우던 적수라 해도 일단 손을 잡으면 그 앞에서 서슴없이 먼저 고개를 숙일 줄 알았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사람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었어. 고 김성한 선생이 쓴 〈왕건〉이라는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나와. 후백제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을 때 왕건의 부하인 신숭겸이 왕건의 의복을 갖춰 입고 왕건 대신 목숨을 버리는 장면이 나와. 그때 신숭겸은 몸을 피하는 왕건에게 다음과 같이 반말로 부르짖어. “네가 예뻐서가 아니다. 천하를 위해서 이러는 것이다.”

ⓒ연합뉴스북한 개성시 서쪽 만수산 중턱에 자리 잡은 고려 태조 왕건릉.
오래전에 읽은 내용이지만 신숭겸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지겨운 난세를 한시라도 빨리 피를 덜 흘리고 종식시킬 수 있는 인물,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목숨을 보전해야 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니까. 아들에게 쫓겨난 후 견훤이 왕건에게 항복할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로 신숭겸의 희생은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왕건이 궁예 같은 사람이었다면 견훤이 항복할 생각을 했을까? 몇 번이나 왕건의 목숨을 위협하고 팔다리 같은 부하 장수들을 죽였던 견훤인데 말이야. 하지만 왕건은 견훤이 감격할 만큼의 예우로 그를 맞이해. “견훤을 일컬어 상부(尙父)라 하고 남궁을 관사로 주고 위(位)를 백관의 위에 차지하게 하며 양주를 사하여 식읍을 삼게 하고 겸하여 금백과 노비 각 40구와 구마 10필을 하사”한단다.

천하의 견훤이 이렇게 되자 신라 역시 천년 사직을 스스로 거둬버리게 돼.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여 다시 기업을 보존할 가망이 없는지라 원컨대 신하의 예로서 뵙고자 합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천년을 이어온 신라였어. 마지막 마의태자처럼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은 관록을 지닌 나라였지. 그러나 신라 사람들은 왕건에게 나라를 통째로 들어 바친다. 후삼국 최후의 대전이라 할 일리천 전투에서 견훤은 고려군의 선봉에서 말을 달렸고 후백제군 장수들은 옛 주인을 보고는 창을 던져버리고 견훤에게 달려와 엎드렸어. 후백제의 이름은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지.

여차하면 누구에게든 수그릴 줄 알았고, 강릉의 실력자 김순식처럼 자신에게 칼을 빼들고 반기를 들었던 사람도 기꺼이 끌어안았으며, 견훤처럼 자신의 목숨을 경각으로 몰아넣었던 원수에게도 ‘아버지’라 불렀던 통큰 남자, 정유년 닭띠 왕건은 자칫하면 세 낱으로 갈려 얼마든지 더 죽고 죽이며 원한과 악업을 쌓았을 한반도 사람들을 아우르는 왕조를 창건하게 됐어.

2017년 정유년이 밝았다. (음력설은 좀 남았다만) 올해는 우리가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 해야. 누가 이 나라의 지도자가 돼서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지 모르겠지만 제발 바라는 일은, 우리가 2016년 병신년에 당했던 뼈아픈 배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1897년 정유년에 뒤통수를 쳤던 대한국 국제 같은 퇴보에 황망해하지 않으며, 증오와 불신으로 점철된 사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누가 누구를 ‘타도’하고 ‘근절’하고 ‘격멸’하지 않고 상식에 기반한 포용력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한국 사회를 다듬을 왕건 같은 리더십과 마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적어도 2016년 11월, 12월 우리 가족을 비롯해 광장에 나섰던 수많은 촛불들은 그에 합당한 지도자를 찾을 복 정도는 있을 거라고 아빠는 외쳐본다.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자꾸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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