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역모 와중에 국방부장관은 8시간 연락 두절…“이게 나라냐”

장태완 장군이 남긴 12·12 전후 10시간의 기록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6년 12월 29일 목요일 제485호
댓글 0
“12월12일 만찬합시다!”
전두환으로부터 이런 초대 메시지를 받았을 때만 해도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자신을 만찬 자리에 묶어놓은 그 시각,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진행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반란군 동태를 파악한 뒤 쿠데타를 진압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장태완 장군은 훗날 기자에게 자필로 기록한 육필 수기를 원본 상태로 넘겼다. 쿠데타 진압에 실패하고 반란군에 체포된 직후 조서 용지에 몰래 적어 비밀리에 보관했던 메모를 토대로 정리한 12·12 작전일지다. 장태완 장군이 “거의 유언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썼다”고 말했던 이 일지는 전두환이 초청한 만찬에 참여한 12월12일 오후 6시30분부터 반란 진압 진영이 무너져 자신이 체포된 이튿날 새벽 4시30분까지의 10시간을 분 단위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국가와 군대의 존재 이유를 새삼 되묻게 하는 그의 수기 원본을 전재(全載)한다.

1979년 11월16일 서울 필동 수도경비사령부에서 거행된 사령관취임식에서 장태완 소장(오른쪽)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 1979년 12월:허화평이 들고 온 전두환의 금일봉

 12·12 사태 며칠 전 전두환의 비서실장인 허화평 대령이 내 사무실로 자기 사령관의 전갈을 갖고 왔다기에 만났더니 일금 100만원짜리 수표 1장과 조그마한 메모지가 들어 있는 봉투를 주었다.
 메모지에는 “형님! 얼마 되지 않지만 집의 김장에 보태 쓰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 씌어 있었고, 허 비서가 “저희 사령관님께서 장 사령관님의 취임 환영 파티를 열겠다고, 허락되시는 일시를 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하기에 나의 대답인즉, “이 봉투에 관해서는 내가 직접 자네 사령관에게 이야기할 일이고, 우리들은 서로 협력할 사이이니, 서열상으로 보더라도 나의 취임 파티는 부대 파악이 끝나면 내가 먼저 내야지 말이 되는가? 내가 부대 파악이 되는 대로 연락해주겠다고 전해주게” 하고 허 대령을 돌려보낸 직후, 참모장인 김기택(전두환 동기) 장군을 불렀다.

 “이 사람아! 보안사령부가 이렇게 돈이 많은 부대인가? 내 평생 개인적으로 이렇게 많은 돈은 받은 적도 준 적도 없소. 더욱이 김장에 보태 쓰라니 말이요. 그까짓 김장이야 집사람이 몇 만원 가지고 자기가 알아서 할 텐데…. 이거 곤란한데. 아무튼 보내준 것을 곧장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고 갚을 방법을 건의해주시오. 내가 과거에 2년여 이 부대에서 참모장을 해봤지만, 이런 돈이 나올 수 없었어. 명절이나 창설기념일에 대통령 각하께서 장병 1인당 닭 반 마리꼴로 돌아갈 수 있도록 300만~400만원을 주시는 것밖에는 없었어. 곧 연말연시가 다가오는데, 지금은 최규하 대통령도 청와대에 들어가 정식 직무 수행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이제 갓 준장이 된 정동호 경호실장 대리도 무슨 일만 있으면 나한테 와서 상의하는 판인데 그 친구한테서 돈이 나올 것이 아니니, 총장님과 장관님께 가서 돈 100만원씩 얻고 이 돈 100만원까지 합해서 병사들의 연말 특식 준비에 쓸 수 있도록 당신이 보관해두시오.”

■ 쿠데타의 서막:전두환의 전갈 “12월12일 오후 6시30분에 만찬합시다”

 그 며칠 뒤 이번에는 우리 사령부 헌병단장 조흥 대령이 들어와서 보고하기를 “오늘 마침 전 사령관실에 인사하러 갔더니 전 사령관께서 오는 12월12일 오후 6시30분에 사령관님과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 헌병감 김진기 장군(당시 계엄사령부 치안처장)을 모시고 단합 만찬을 하자고 건의드려 보라고 하셨습니다” 했다. 언뜻 드는 예감이 혹 이 친구가 유력한 장군을 모시고 진급 청탁을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불쾌감이 순간적으로 들어 “그런데 왜 자네가 연락해? 혹시 자네 이번에 진급하겠다고 경거망동한다면, 자넨 장군될 자격이 없어! 내가 자네 술 얻어먹게 됐나, 지금?” 하고 나무랐더니 극구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길래, 지난번 허 비서를 통해 한번 전갈이 있기도 해서 “그럼 좋아” 하면서도 미심쩍어 한번 조 대령을 교육시킬 겸 “이 사람아! 나는 군의 삼거지악(三去之惡)을 신조로 삼고 있어. 그 첫째가 전임자를 욕하는 놈, 둘째는 부지휘관을 잘못 모시는 놈(지휘관 위주의 아첨파), 셋째는 직속 부하로부터 음식이나 술대접을 받는 놈을 제일 못되고 추잡한 놈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자네도 참고하게” 하면서 “자네는 그날 나오면 절대 안 돼” 하고 돌려보냈다.
 
■ 12월12일 18시30분:만찬에 나타나지 않은 전두환

 1979년 12월12일 오후 6시경, 전속부관 천연우(육사 28기) 대위가 집무실에 들어와서 “사령관님, 오늘 6시30분에 보안사령관의 만찬 초대가 있습니다. 가시지요” 했다.
 “뭐, 벌써 떠나? 장소가 어디인데?” 하고 반문했더니 “연희동인데 지금쯤 떠나야 시간이 맞을 것 같습니다” 한다. 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타 이것저것 상념에 잠겨 전속부관이 안내하는 대로 가던 중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리 봐도 음식점 골목이 아니고, 고급 주택들이 널찍하게 들어서 있는 주택가였다. 널찍한 잔디 정원에 화초가 잘 가꾸어진 2층 석조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그리고 우국일 보안사령부 참모장이 와 있었는데 전 장군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마침 우 장군이 변명 삼아 “참 죄송합니다. 장 사령관님. 실인즉 전 사령관께서 대통령 각하께 호출되어 갔는데 늦어도 8시까지는 꼭 참석하겠다고 하면서 죄송하지만 먼저 주연을 시작하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하기에, 나는 처음 보는 조용하고 훌륭한 환경이라 “뭐 그렇게 서두를 필요 있나? 어두워질 때까지 이 좋은 잔디밭에서 화초도 구경하면서 칵테일이나 한 잔씩 하다가 전 장군이 오면 같이 합시다” 했더니, 정병주 장군이 퉁명스럽게 “늦게 오는 전두환이 때문에 우리가 기다릴 필요 있나” 하면서 초겨울의 조금 쌀쌀한 기운이 싫었던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일행도 모두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서 나는 깜짝 놀랐다. 얼마 전 나의 집무실에서 전 장군 주연 연락을 하다가 혼이 났던 헌병단장 조흥 대령이 방에 있지 않은가. 다짜고짜 “자네 왜 여기 와 있어? 어서 돌아가. 고약한 친구로구먼” 하며 남녀 좌중 앞에서 지나칠 정도로 모욕적인 책망을 주었더니 주위에서 모두 말리며 “유명한 장 사령관 호위 겸 나왔는데 뭐 그렇게 야단이야” 하면서 분위기를 무마시켜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란 것은, 좌중에 배치된 여인들이 평범한 양장을 하고 화장도 그리 눈에 띄지 않게 하고, 나이도 20대 초반의 앳된 것이 여대생이나 연예인같이 보였으며, 특히 민 마담이란 여인은 전두환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여성이었다.

 ‘이놈의 개새끼들! 윤필용 버릇 그대로 답습하는군. 이것들을 왜 하루속히 순수성과 청렴과 희생적 충성 정신을 신조로 삼는 군대에서 쫓아내지 않고 지금껏 이따위 못된 행실을 하게 방치해두는가’ 하는 원망과 불쾌감이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그 순간 정병주 장군이 눈치를 챘는지 선배답게 “자! 장 장군, 우리 다 같이 앞으로의 단합을 위해 건배합시다” 하기에 좌중은 작은 잔으로 ‘시바스리갈’ 한 잔씩을 스트레이트로 들이켰다. 그리고 그동안 비상시국이라 너무 격조했다는 등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하면서 서로 한두 잔씩도 채 권하기 전에 김진기 헌병감에게 민 마담이 귓속말로 밖에 전화가 왔다는 전갈을 했다.
 
■ 12월12일 19시40분 :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김 장군이 밖으로 나갔다가 2~3분 후 들어오면서 심각한 얼굴로 나를 향해 밖에 나가보라는 무언의 표정을 짓길래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면서 김 장군 귀에다 대고 “뭐야?” 하니 천만 뜻밖에도 “총장님 공관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하는 게 아닌가.
 서둘러 나가서 총장님 공관에 전화를 했더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앰뷸런스, 앰뷸런스!” 하며 전화가 끊겼다. 그때 마침 차에서 기다리던 전속부관 천 대위가 옆에 와 있다가 “사령관님! 부대 상황실에서 연락이 오기를, 총관님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총장님의 생사와 누구의 소행인지를 아직 파악 못하고 있답니다” 하고 보고했다.

 그때가 오후 7시40분경, 즉 주연을 시작한 지 10여 분 남짓한 때였다. 방으로 뛰어들어가 “모두 이럴 때가 아니야. 총장님 공관에 불상사가 생긴 것 같아. 빨리 돌아가” 하면서 헌병감을 잡고 밖으로 나오자 정병주 장군이 뛰어나오면서 “여보, 장 장군!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묻는다. 그분과는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마음을 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서 대뜸 그분을 향해 “여보, 정 선배!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래요?” 하니 “이게 무슨 소리야? 생명을 같이하자!” 하고 내 손을 꽉 잡아 쥐는데 순간적으로 육감을 통해 크게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차에 올라탔다. 이미 조흥 헌병단장과 전속부관이 차에 타고 있었다. 우선 부대 상황실 책임자를 대라 하고 비상 라이트를 켜고 사이렌을 울리며 부대로 질주해가면서 판단해보았다. 이 국가적 혼란기에 박정희 사조직들이 최규하 대통령이 아직 군을 전혀 장악하지 못한 차제에 전군의 총군령권자이고 계엄총사령관인 총장님을 제거함으로써 정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일으킨 쿠데타임이 거의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승한 조흥 헌병단장에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슬쩍 떠봤더니,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북괴 간첩 소행이 아니겠습니까?” 하며 딴청을 부리는 것이었다(조흥 헌병단장은 쿠데타 당시 본인을 주연에서 만취케 하여 그들이 예정한 쿠데타 성공 예정 시간인 밤 8시30분 이후까지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임무를 전담한 자로 훗날 판명됐다).
 
■ 12월12일 19시55분:헌병 특공대 1차 파견

 그 도중에도 부대 상황실에 몇 번이나 차내 전화 또는 무전으로 상황을 파악해보아도 더 이상 전혀 모르고 있길래 오후 7시55분경에 경장갑차(APC) 1대와 헌병 특공대 1개 소대 규모로 하여금 총장님 공관으로 가서 긴급 구출과 부상자를 처리하고 현지 상황을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또 전 부대에 비상을 걸고 전 단장은 상황실로 집합하라고 지시했다.
 
■ 12월12일 20시:장세동·김진영·황동환·조흥의 명령 불복종

 밤 8시경(출발 20분 후) 부대 상황실에 도착하였더니 지시된 제 사항들은 진행되고 있었으나, 4개 단장 중 갑종 출신인 황동환 방공포병단장 외 ‘하나회’ 멤버인 장세동 30단장, 김진영 33단장이 없었으며 방금까지 동승해온 조흥 헌병단장도 행방불명되었다.
 직감적으로 ‘하나회’ 사조직 집단들의 소행임을 감지하면서도 원만한 부대 수습의 여지를 갖기 위해 ‘단장들을 빨리 소집하고, 서울 외곽 19개 검문소의 검문검색을 강화하여 총장님을 확인 구출하라. 그리고 다른 명령이 없는 한 외부로부터의 인원 및 부대의 출입을 일절 금하여 확실한 부대 파악 및 지휘 기능 수행에 만전을 기하라”고 김기택 참모장에게 지시했다. 2층 집무실에 올라가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육본·국방부·총장 공관에 상황을 문의해봤으나 불통돼 전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고 예측도 할 수 없었다.
 
■ 12월12일 20시7분:헌병 특공대 2차 파견

 7분 후인 밤 8시7분에 다시 지하 상황실로 내려가서 그동안 들어온 상황 보고를 받았으나 전혀 진전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선 총장 공관 일대를 철저히 확인하기 위하여 헌병 1개 소대·전차 1대(위협용)·경장갑차 1대·사이카 2대·앰뷸런스 1대·2.5t 트럭 1대 등의 특수 임무 부대를 편성하여 신윤희(당시 중령·육사 18기, 하나회 멤버. 쿠데타 음모에서 수도경비사령부 내부의 총괄 책임자로서 별명에 의하여 사령부 진압 및 사령관 체포 책임을 전담한 자로 후에 판명됨) 헌병부단장을 총지휘관으로 임명, 총장 공관으로 파견하여 ‘총장 소재 확인 및 구출과 현지 상황을 즉시 보고하라’는 임무를 주어 출동시켰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왼쪽 두번째)이 휘하 부대인 청와대 33경비단을 찾아 김진영 33단장(지휘봉 든 사람)으로부터 부대 배치 현황을 보고받고 있다. 며칠 후 김진영 대령은 12·12사태 주역으로 변신했다.

■ 12월12일 20시40분: “허삼수가 총장님을 납치했다”


 그러나 30여 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보고가 없어서 무전으로 호출하여 확인한 결과, 10분 거리에 있는 그곳에 이제야 막 도착하여 작전 계획 수립 중이라는 뚱딴지같은 보고를 받고 ‘역시 비전투병과 장교는 할 수 없군’ 하는 생각에서 참모장에게 부대 수습과 전투태세 확인을 지시하고 밤 8시40분경에 박웅 정보참모(육사 17기)와 전속부관을 데리고 총장 공관을 향하여 막 장충단고개를 지날 무렵, 그렇게 무전으로 연락해도 나오지 않던 윤성민 육참차장의 무전을 받았다. “여보, 장 장군! 어디 있소?” 하기에 “저는 지금 총장님 공관으로 가는 중입니다. 도대체 참모차장님은 왜 그렇게 통화하기가 힘듭니까? 지금 총장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하고 다급하게 물었더니, 그분의 응답이 “보안사 권정달 대령(착오)과 허삼수 대령이 총장님을 납치해서 어디론가 가버렸어. 그곳에도 총장님이 계시지 않아. 빨리 사령부로 돌아와서 수습책을 강구합시다”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차는 총장 공관 부근 굴다리 앞에 도착했다.
 
■ 12월12일 21시:전두환 세력의 회유 작전 “우리한테 합류하시오”

 육·해·공 3군 총장, 합참의장, 국방부장관 등의 공관 밀집지역 내부에서는 간헐적인 소총 사격이 외부를 향해 날아오고 밤 7시 55분경에 1차로 파견한 특공대와 경장갑차 1대, 그리고 밤 8시7분에 2차로 헌병부단장을 지휘관으로 하여 파견한 전차를 포함한 특수 임무 부대가 공관 지역 입구의 굴다리 일대에 배치돼 공관을 향해 사격 태세만 갖추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는 황관영 육본 본부사령과 최인수 육본 비서실장, 해병대 헌병감도 나와 있었다.

 파악해본즉 공관 지역 일대는 원래 대통령에게 결례가 된다 하여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파견하지 않고 해병 1개 중대로 경비를 담당케 하고 있는데(처음 안 사실), 지금 육군 헌병감실 성환옥(육사 18기, 하나회 회원) 기획과장이 마이크로 버스에 헌병 약 1개 소대를 태우고 총장 공관으로 사건 진압차 들어갔는데, 범인들은 이미 외부로 탈출하고 헌병 경비병들이 뒤늦게 이들 버스를 포위해 억류하고 있으며, 이들을 구출하려는 외부 병력(본인이 1·2차로 파견한)을 향하여 들어가지 못하도록 위협사격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가 밤 9시경이었다.

 밤 9시경 지하 상황실에 들어가서 참모장으로부터 그 당시까지 파악된 종합 상황을 보고받기 시작했다. 너무도 놀라운 사실들이었다. 즉 우리 사령부 중에서도 임무 수행상 성역 부대라 볼 수 있는 경복궁 내의 제30경비단 본부 내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한국 방어 계획상 제1 중요 접근로인 1번 도로, 즉 통일로를 중심으로 한국군의 방어 주력(병력 화력장비 감시체제 방공시설 지휘 및 통신시설, 진지 편성 장애물 등. 기타 보안상 생략)을 집중 투입한 지역을 담당하는 황영시(육사 10기) 1군단장, 국가의 정치·문화·경제·사회의 총집중 지역인 수도권의 방어 임무를 담당하는 차규헌(육사 8기) 수도군단장, 제2군단장을 역임한 유학성(정훈 1기) 국방부 군수차관보, 그리고 접전하고 있는 전방 제9사단의 노태우(육사 11기) 사단장, 10·26 사건 이후 계엄부대로 태릉에 출동 중인 박준병(육사 12기) 제20사단장, 수도권의 백운택(육사 11기) 제71방어사단장, 박희도(육사 12기) 제1공수여단장, 최세창(육사 13기) 제3공수여단장, 장기오(육사 12기) 제5공수여단장, 그리고 본인 휘하의 장세동(육사 16기) 제30단장, 김진영(육사 17기) 제33단장, 조흥 헌병단장, 그리고 정동호(육사 13기) 경호실장 대리, 경호실의 고명승 작전과장 겸 상황실장, 기타 추가로 예상되는 수많은 역모자들이 모여 정권 탈취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 내지는 진압할까 방법을 구상하면서 30단장 장세동 대령을 전화로 호출했더니 유학성 군수차관보가 받았다. “아, 유 선배님! 거기 왜 갔어요? 나도 밤에는 특수한 경우 외에는 그곳을 출입하지 않는데 여럿이 모여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을 감쪽같이 묵인할 테니 돌아가시고, 총장님을 어서 댁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지금 국민들이 이러한 군부의 동향을 알면 어떻게 할 셈이요? 제발 빕니다. 선배님!” 했더니 “여봐, 장태완이!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리 와서 우리하고 일 좀 같이 해” 하는 것이 아닌가. 그만 참고 있던 울분이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야! 이 더럽고 추잡한 놈아! 너는 끝까지 그따위 처신으로 군인 생활을 마칠 것인가?” 하면서 한참 동안이나 욕설을 퍼부었더니 그는 “야! 황영시 바꿔줄게!” 했다. 황영시는 수화기를 들자마자 “야, 장태완이! 자네 왜 그래! 자네야말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아닌가? 화를 풀고 이제 유 형님이 권유한 대로 이리 와! 우리랑 일 좀 같이 해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역시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그래도 그와는 평상시 사이좋게 지내던 터다.

 “아니 형님마저도 이러시기요? 정승화 장군님의 총장 취임 운동을 쫄자인 저한테까지 부탁하던 형님이! 이제 그분이 참모총장이 되셨으니 최선을 다해서 모셔야지요. 사이가 좋으면 형님이 더 가깝지, 제가 총장님을 언제 한번 모시기나 했나요? 이번이 처음이지. 그러니 어서 돌아가십시오. 없었던 일로 제가 목숨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그리고 총장님은 살아계십니까, 아니면 돌아가셨습니까? 살아계시다면 제발 댁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이렇게 애걸복걸했으나 끝까지 그곳으로 오라는 바람에 화가 치밀어올라 “야, 이 똥뙈놈 같은 놈아!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인격자, 배신자 더러운 놈아! 너희 놈들 거기서 조금만 더 기다려! 내 전차를 몰고 가서 네 놈의 대가리부터 깔아뭉갤 것이다!”라고 했더니 “야! 차규헌이 바꿔줄게!” 한다. 그 순간 나는 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 12월12일 21시30분:국방부차관·3군사령관 “그놈들을 빨리 소탕하시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약 30분 정도가 흘러 밤 9시30분경, 국방부장관실에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부재중이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아도 없는 노재현 장관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김용휴 국방부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 파악한 상황을 보고하고 “차관님! 어서 장관님을 찾아 이러한 국가 반란 시에 제가 배속받아 사용할 수 있는 4개 사단 중 우선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서울 근교 4개 공수여단 중 세 놈은 저쪽에 가 있으니 ‘하나회’ 멤버가 아닌 윤흥기 장군이 지휘하는 제9공수여단을 저놈들이 자기 부대를 데리고 나오기 전에 속히 저에게 보내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다.

 “알았어. 그놈들 당장에 해치워야지. 장태완이, 파이팅!” 김 차관은 잘하라고 당부까지 하였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전화해 지금까지의 상황을 알려드리고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서울운동장과 장충단 일대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더니 “알았어. 윤필용·전두환 그 못된 놈들이 장난을 하는 모양인데 장 장군이 잘해야 돼! 그리고 황영시 1군단장과 차규헌 수도군단장 이 두 놈들은 내 허락도 없이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죽일 놈들이구, 내 그놈들이 예하부대를 절대 서울로 옮기지 못하게 단단히 잡아둘 터이니 걱정 말고 그놈들을 빨리 소탕해야 돼!” 하기에 바짝바짝 타오르던 목의 갈증이 좀 풀리는 듯 가장 반가운 격려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윤성민 육참 차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까지의 상황, 국방부차관·3군사령관과의 대화 내용 등을 다 이야기하고 “총장님이 안 계시니 참모차장님께서 모든 군령권을 독단적으로 행사하여주십시오. 국방부야 어디까지나 군정 단위 아닙니까” 하고 육군참모차장이란 직제의 권위와 기능을 치켜올려 드렸다.
 
■ 12월12일 21시50분:박희도 1공수여단장의 서울 진격

 밤 9시50분경에 아까 연희동 회식장에서 황급히 헤어졌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 어떻게 되어가오?” 하는 식의 질문이기에 대략 지금까지 이곳에서 진행되어가는 상황을 설명하고 두 가지 문제점을 들어 걱정을 했다. “첫째는 이건영 3군사령관이 내가 초저녁에 요청한 진압 병력인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을 아마 장관님의 승인을 받고 난 후에 출동시켜줄 모양인데 장관님이 어디 계신 줄 알아야지. 일설에는 미8군으로 피신했다는 소리도 들리고, 도무지 이래 가지고서야 김일성이가 남침해온다면 어디 6·25 때보다 나을 것이 뭐가 있겠어요?” 하고 투덜댔다.

 그러자 정 장군이 “여보, 나 조금 전에 노 장관님과 통화했어. 먼저 문홍구 합참본부장한테 전화가 와서 ‘이 애들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신중을 기해달라. 여기에는 장관님도 계신다’ 하더니 바로 노 장관이 수화기를 바꿔 들고 ‘너 정병주야? 야, 너의 여단이 국방부를 쳐들어온다는데 막아다오. 유학성·황영시 이 사람들이 장난을 한다’기에 ‘장관님, 장난하는 놈은 장관님이 가지고 있는 수사기관을 가지고 잡으십시오’라고 대답했다”는 내용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점을 제기했다. “오늘 밤의 승패는 형님이 그곳 공수단을 잡아두는 것과,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이 저놈들보다 먼저 출동하여 저들을 진압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곳 여단 사정은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그는 “박희도 장군의 제1공수여단이 출동하고 있다는 참모 보고를 받고 내가 박희도 제1공수여단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없다기에(훗날 확인해보니 제1공수여단장은 오후 6시 이후 경복궁 반란군 집단에 이미 가 있었다), 전화를 부단장 이기룡(육사17기) 대령에게 바꾸게 해서 ‘너희들, 사령관 지시 없이 부대 출동이라니 무슨 짓이냐? 즉각 중단하라’ 하고 이순길 부사령관과 헌병대장을 시켜 ‘즉시 제1공수여단에 나가서 내 명령이라고 하고 부대 출동을 중지시키시오. 만약 불응하면 헌병대장으로 하여금 그놈을 잡아오도록 하시오!’ 하고 지금 제1공수여단이 출동한 현지로 보냈다”는 내용을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을 불러 유사시에 명령을 즉각 수행할 수 있도록 상황을 잘 판단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나는 저 양반도 이제 끝장이다 싶었다. 당일 오후 6시부터 박희도 제1공수여단장·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장기오 제5공수여단장 이 세 놈들이 다 우리 30경비단에 있다가 전두환이로부터 출동 지시를 받고 부대로 돌아온 놈들인데, 뭐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제3공수여단장을 불러 격려를 해주었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공수단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대두되기 시작하였구나 생각했다.

 이윽고 특전사령관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그쪽 이순길 부사령관이 제1공수여단에 나가 부대 출동을 만류했더니 박희도 여단장은 “부사령관님! 저는 이미 이 길을 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고 출동을 계속하더라고 전해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정 선배님! 그 ‘하나회’ 조직원인 제 1·3·5 공수단장 놈들은 전두환이가 시키는 대로 할 테니 믿지 말고 남은 일반 장군 출신인 윤홍기 장군의 제9공수여단을 곧바로 나한테 보내주십시오. 나는 지금 3개 전투단장과 병력이 전부 반란군에 가담하고 본부 행정병력 1개 중대밖에 없습니다. 제발 속히 좀 보내주십시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장태완 사령관(오른쪽 두번째)의 경복궁 주둔 30경비단 순시. 왼쪽에서 두번째가 장세동 대령, 맨 오른쪽이 합수부에 파견됐던 33헌병대장 최석립 중령. 두사람은 하나회 회원으로 12·12 당시 장사령관을 따돌린 뒤 쿠데타 진영에 가담했다.
 
곧이어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에게 “특전사령관과 상의가 되었으니 제9공수여단을 수도경비사령부로 지금 곧 배속해주십시오” 하고 건의했다. 잠시 후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참모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육군은 총장이 유고하기 때문에 이제부터 내가 지휘한다. 우선 제9공수여단을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즉시 배속 출동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전해주었다.
 “참 고맙습니다. 그런데 시경 보고에 따르면 박희도의 제1공수여단이 김포에서 서울 쪽으로 수십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이동 중이라는데, 우선 본인으로서는 저지할 만한 병력이 없으니 비상수단으로 한강의 19개 교량에 전부 바리케이드를 쳐서 시민들이 불편하겠지만, 민간 차량으로 전 교량을 꽉 메워 장애물로 활용해 제1공수여단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야겠습니다. 그런데 제9공수여단이 출동해온다면 어느 교량을 사용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제1한강교가 좋지 않겠소?” 하기에 “좋습니다. 그러면 윤홍기 장군의 제9공수여단이 제1한강교에 도달하면 윤 장군이 차에서 내려 한강검문소까지 나와 육성으로 도착을 보고해주면 확인 후 제1한강교의 바리케이드를 풀고 제9공수여단을 통과시킨 후 다시 차단하겠습니다” 하고 약속했다.
 
■ 12월12일 22시:“한강 19개 교량을 바리케이드로 막으라”

 그리고 곧 한강의 19개 교량을 바리케이드로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때가 밤 10시경이었다. 그때 마침 하소곤(갑종 1기)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부터 제1공수여단이 제1한강교 쪽으로 오니 차단하라는 연락이 왔다. 마침 친구 사이인지라 “출동시켜달라는 병력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조치 하나 하지 않고 본부 행정병력 외에는 전부 반란군 편으로 돌아갔는데 내가 무슨 병력으로 막으란 말이냐?” 화풀이를 하고 나서, 민간 차량으로 다리를 막도록 임시방편을 막 취하고 있는 중이니 빨리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을 보내달라고 독촉했다.
 
■ 12월12일 22시20분:“사령부 내 보안사 요원 모두를 영창에 집어넣어라”

 그러던 중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서 “사령부에 파견된 보안부대 요원들이 상황실을 드나들며 사령관님 작전 조치 사항들을 자꾸 엿들어서 보안사령부에 계속 보고하는 것 같습니다” 하고 귀띔해주었다. 그 순간 ‘아차, 실수했구나. 벌써 조치해야 할 사항이었는데…’ 하고 뒤늦게 후회하면서 “지금 즉시 우리 사령부에 파견된 모든 보안부대 요원을 입창시켜 철저히 감시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보안부대로 통하는 모든 통신선을 절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때가 밤 10시20분경이었다.

 바로 조금 전 밤 10시15분경 위병소에서 육본 참모차장과 참모부장 일행, 문홍구 합참본부장이 수행요원들을 데리고 정문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우리 사령부로 피난 오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참모장을 시켜 내 집무실이 넓으니 그들에게 사용하도록 안내하고 사령관실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내 접견실을 사용하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한 후, 병력 출동이 급해서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령관님!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의 출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몇 시간 전에 사단장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출동 준비 완료 후 명령 대기 중이라는 보고가 있었는데, 명령만 내리시면 한 시간 내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잖습니까? 저놈들은 제1공수단을 이동시키는 중이며, 전방 병력 9사단도 움직일 낌새가 보입니다. 저놈들보다 먼저 병력을 도착시켜주셔야 진압이 되지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빨리 출동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애걸했더니 초저녁과는 대화 내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보, 장 장군! 30사단과 33사단은 절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놓았으니 안심하고,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을 서울로 출동시키는 문제는 장관님의 허가를 받아서 실시하겠소.”
 “사령관님! 지금 장관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계시는 곳을 모르겠습니다. 독단(獨斷)이라도 내려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는 순간 제1한강교 쪽으로 오던 제1공수여단이 한강 인도교에서 민간 차량에 밀려 있자 김포 방향으로 회군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필경 어느 곳을 택하든 서울로 진입할 것은 틀림없는 일이라 어느 곳이 될 것인가를 작전 참모(박동원 대령·육사 14기)에게 검토시켰더니, 조금 후에 “행주대교가 될 것 같습니다. 이곳은 저희 수도경비사령부 책임 외의 지역이며, 우리 사령부 검문소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고 보고했다.
 “그렇다면 수색 방면 아니면 구파발 쪽이 될 것 아니겠는가?”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바로 수색에 주둔하는 박희모 제30사단장(갑종)에게 전화했다.
 “여보, 당신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나의 지시를 받게 되어 있소. 지금 김포의 제1공수여단이 행주대교 쪽으로 갔으니 오전 1시 이전에 구파발 쪽 아니면 수색 쪽으로 갈 거요. 당신 사단도 방패 사단(반란 진압 사단으로서 유사시는 수도경비사령부에 의명 배속됨)이니, 철저하게 저지하도록 하시오.”
 그는 사단장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나의 조언이 컸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아는 처지라 거의 믿을 수 있을 정도의 복종 의사를 표시해와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관건은 제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의 조기 출동에 있었다.
 
■ 12월12일 22시45분:쿠데타군에 장악된 청와대 주변


 그리하여 상황실에서 2층 집무실로 가서 참모차장 및 육본 참모 일행과 합참본부장 등 10여 명과 인사를 나누고 그간의 상황 진전과 문제점 등을 설명해주었다. 그들이 도착한 지 30여 분이 지난 밤 10시45분경이었다.
 그때 정문에 육군본부 파견 변규수 보안부대장(준장)이 왔다고 연락이 왔다. 아마 그는 육본의 주력 인사들이 수도경비사령부로 육본 기능을 이동해왔으니, 당연히 육본을 담당하는 정보 책임자로서 자기도 합류해서 모든 동태를 보안사령부로 보고도 할 겸 나를 설득해보려는 심사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미 우리 사령부에 파견되어 있는 모든 보안사령부 요원들을 입창 조치하고 있었던 터라 참모차장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문의했다.

 “구속 입창시키시오!”
 나는 그대로 즉시 정문 위병소에 지시했다. 나중에 변규수 준장은 “수경사의 헌병 중위와 헌병들이 와서 내 차를 둘러싸더니 다짜고짜 ‘내리라’고 하고는, 수행 보좌관 강 중위·운전병 등 셋을 무장해제와 동시에 포승줄로 꽁꽁 묶어서 영창 같은 곳에 집어넣기에 내가 ‘이봐, 내 계급을 봐라! 도망칠 신분이 아니잖는가? 누가 나를 구속영장도 없이 이렇게 구금하라던가?’ 하고 물으니 ‘상부의 지시오’ 할 뿐 말없이 가버려 다음 날인 12월13일 새벽 4시까지 12월의 겨울밤을 벌벌 떨면서 지냈다”고 보안사령부에 보고했다는 말을 들었다.

 정승화 총장님은 납치되고 국방부장관은 행방불명이어서, 최규하 대통령을 모셔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에 마침 김진기 헌병감이 내 방으로 건너왔다.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가용한 헌병 병력을 인솔하여 최규하 대통령을 모시고 올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약 1시간 뒤 김진기 헌병감의 말에 의하면 삼청동 최규하 대통령 공관은 청와대 정동호 경호실장 대리, 고명승 경호실 작전과장 이 두 사람이 진두지휘하여 청와대 경호실의 수개 중대 병력이 동원되어 이중 삼중으로 빈틈없는 경계와 차량 통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12월12일 22시50분:“역모자들을 발견 즉시 체포·사살하라”

 그 후 밤 10시50분경 사령부 내에 잔류하고 있는 전 장교 60여 명(전체 450명 중 390명은 대부분 반란군에 가담)을 사령부 기밀실에 집합시켜 사령관의 비장한 결의와 최후의 작전 지시를 하달했다.
 “내 생명과 같이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여러분이야말로 정말 표리가 없는 진정한 군인이오. 여러분이 우리 사령부를 대표하는 충성심에 불타는 간부들임은 이제 바로 이 모습으로 서로에게 증명되고 있소. 여기 모인 60명의 동지를 제외하고는 390명의 장교들이 경복궁 제30경비단에서 국가 반란을 모의하는 그 무리들과 함께 작당하여 여기 있는 사령관 이하 사령부에 잔류한 우리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니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이오? 모든 것이 이 사령관의 지휘 능력과 덕망 부족의 소치이며, 취임 24일밖에 안 되어 미처 이러한 암적 요소들을 사전 제거해내지 못한 나의 책임임을 이해해주기 바라며 다음과 같은 가슴 아픈 명령을 하달하니, 천지신명께 맹세하고 각자가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해주기 바라오.
 첫째, 제30경비단장·제33경비단장·헌병단장 등을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사살하라.

 둘째, 제30경비단에서 반란 역모하는 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니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사살하라.
 셋째, 기타 여기 없는 동료 장교들을 최선을 다하여 설득하여 본대로 복귀시켜라. 그러면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치지만 끝까지 역모에 가담하겠다면 그도 가차 없이 사살하라.
 넷째, 각 외곽 검문소의 출입을 철저하게 검문검색하고 수상한 자는 별도 조사 후 조치하라.
 다섯째, 방송국 및 각 검문소 병력을 분대 규모에서 소대 병력으로 증강하라.
 여섯째, 현재 반란군에 가담하고 있는 청와대 뒷산 팔각정 주변에 배치된 병력을 제33단 부단장이 가서 설득하여 은밀히 사령부로 철수시키도록 노력하라.
 일곱째, 사령부에 잔류한 전차 4대(기타 대대 주력인 32대는 반란군에 가담), 토우(TOW·대전차유도탄), 3.5인치 로켓포 등 가용한 모든 화포는 탄약 상자를 개봉하여 완전히 차량에 탑재하여 자체 방어에 임하라.”
 이상과 같은 최후 전투태세 명령을 내리고 2층 육본 일행이 있는 집무실로 내려가서 윤성민 참모차장과 최후 담판을 했다.
 
12·12사태 며칠 전 헌병단장 조 홍 대령(왼쪽)을 만나 부대 관리를 지시하는 장태완 사령관, 조 흥 대령은 12·12사태 당일 반란 진압군측 장성들을 연희동 술자리에 묶어두는 임무를 맡았다.

■ 12월13일 0시:“경복궁과 보안사령부를 공격하라”

 “참모차장님! 지금 시각이 12월13일 0시가 지났습니다. 육본 수뇌부가 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이 상황을 유리하게 진행시킨 것이 무엇 하나 있습니까? 전화만 잡고 국방부며 3군사령관, 심지어는 반란군 두목들과 통화한 결과 얻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더군다나 반란군 두목들에게는 ‘장 장군의 과격한 행동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애원조로 양해를 구하는 것 외에 그놈들에게 해산하라든지, 그대로 두지 않겠다든지 하는 위협적인 발언 한번 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제 시간적 여유도 없어요. 우리 사령부의 기능은 완전 마비 상태이고, 저놈들이 동원한 병력들이 서울 시내로 진입할 시간도 멀지 않았어요”라고 짜증스러운 건의를 한 후, 곧 참모장 김기택 준장(육사 11기)에게 출동 지시를 내렸다.

 “참모장! 전차를 선두로 조금 전 기밀실에서 지시한 행정병을 포함한 전 병력을 전투조로 편성하라! 목표는 경복궁과 보안사령부다. 공격 개시선은 퇴계로 아스토리아호텔 앞이다. 즉시 공격 개시 선상으로 모든 부대를 전개하라. 출발은 내가 선도하며 중앙청 부근의 적절한 진지를 잡아 전차포·토우·106㎜ 무반동총·3.5인치 로켓포로 양개 목표를 동시에 수백 발 집중사격한 후 일제히 돌격하여 역모자를 사살 또는 포획한 후 반란을 진압한다. 즉시 본명령을 시달하고 출발을 대기하라!”고 최후 명령을 내렸다.
 이때 윤성민 참모차장의 얼굴이 흑갈색으로 변하며 “장 장군!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오. 최후로 1·2·3군 사령관에게 병력 출동 협조를 구해보겠소” 했다.

 그러고는 우선 이건영 3군사령관과 통화를 시작했는데 옆에서 듣자니 무엇인가 석연치 않아 보여서 수화기를 빼앗아 들고 “아니, 사령관님!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출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여보! 장 장군! 지금 야전군 부대를 동원하면 북의 남침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 부대 출동은 곤란해” 하면서 장관 허락 없이 부대를 출동시킬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것으로 이건영 3군사령관과의 대화는 끝나고 말았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계속해서 김학원 1군사령관과 진종채 2군사령관에게 전화했으나 모두 쿠데타 찬성인 데다 1·2군에서는 거리와 시간도 맞지 않고 출동 가용 병력도 없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보안사령부에서 각 부대 및 각 사령부급에 파견된 보안부대장과 ‘하나회’ 요원 참모들을 동원해 해당 지휘관들에게 쿠데타 성공을 위해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해 나갔으며, 실제로 12월13일 0시 이후에는 쿠데타 부대에게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되어 나가고 있었다.
 
■ 12월13일 01시30분:전차대대의 은밀한 지령 “장태완을 사살하라”

 윤성민 참모차장은 기가 팍 죽고 공포에 질린 채 좌중의 일반 참모들을 향해 “각 군 사령관에게 장 사령관이 요청하는 지원부대 출동에 대한 의견을 타진한 결과 좋은 대답들이 아니었어!” 하면서 천주원 인사참모부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천 장군은 이번 쿠데타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틀림없으니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인 것 같다고 했다. 모든 참모가 인사참모의 의견에 동의하는 어조였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천 장군, 말 바로 하시오. 그래서 병력을 동원하지 말자는 말이요?” 그러자 윤 참모차장은 황의철 정보참모부장의 의견을 물었다. 황 소장 역시 ‘속수무책론’을 주장했다.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안종훈 군수참모만은 확실하게 소신을 발표했다. 즉 “이번 쿠데타가 아무리 세밀하게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진압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국민의 군대요, 군인의 사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 고급 장성들이 우리만 살겠다고 손을 들자는 거요? 나는 장 장군의 의견에 이유가 있을 수 없는 찬성이오” 하고 울분을 터뜨렸다.
 민사정훈감 신정수 소장은 “이 어수선한 시국에 아군끼리 충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바로 옆 남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이희성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당신 부대가 무엇을 하고 있소? 전차 소리가 저렇게 요란하니 혹 당신 저쪽을 공격하려는 것 아니야?” 하고 당황하는 조로 물었다. 화가 치밀어 “아니 부장님! 제가 초저녁부터 저놈들이 장난질한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참모총장님은 납치되고 장관님은 행방불명인지라 저놈들의 진압을 위해 전방 진압부대 출동과 모든 부탁을 다 드렸는데, 그때마다 긍정적 답변을 주시더니 이제 와서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깁니까? 저놈들의 병력은 수개 사단 전투력을 능가하는 각종 부대들로, 목하 서울 시내로 진입하고 있는데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으란 말씀입니까? 도대체 부장님은 누구 편입니까?”

 전화를 끊고 공격 개시선을 향하여 전투용 지프를 타고 부대 정문을 나오자 후미 부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병력이라야 행정 및 기술 병력 100여 명, 전차 1개 소대(4대), 기타 약간의 화포들이었다.
 후미로부터 전방으로 하나하나 전투 임무 숙지 상태와 장비 점검을 해나가고 있는데, 사령관 검열에 앞서 전후 대열을 확인하고 있던 비서실장 김수탁 중령(갑종)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내 귀에다 대고 말했다.
 “지금 제가 저 앞 전차소대 쪽으로 갔더니 제30경비단에 있는 전차대대 본부로부터 사령관님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빨리 이 자리를 피신하여 사령부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우리의 최후 공격 주력이 바로 저 전차 4대인데 저놈들이 저러니 나머지 이 행정 병력들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은 끝난 것 같습니다. 사무실로 올라가서 사후 정리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건의했다.
 직감적으로 ‘이제 수도경비사령부는 내 부대가 아니고, 내 부하들이 아니다. 취임한 지 불과 24일 만에 나의 부대라고 믿었던 내 생각부터가 착각이었다’고 마음속으로 느끼면서 비서실장 건의대로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때가 12월13일 오전 1시31분경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두 가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하나는 제1공수여단이 국방부·육군본부 등을 완전 점령하였으며, 국방부 옥상에 배치된 우리 방공포병단 벌컨포(발사 거리 2㎞ 지점에서 확산되며 분당 최대 3000발 발사) 1개 분대에서 국방부로 접근하는 공수단을 무차별 사격하여 수명을 사살한 것 같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1공수여단이 국방부·육군본부 점령 시에 저항을 받지 않기 위해 보안사령부에서 국방부에 파견한 김병두 보안대장에게, 제1공수여단이 비상 계엄부대로 국방부·육군본부 경계를 나오니 초소를 교대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여 사전 공작이 끝났는데, 미처 국방부 옥상에 배치된 우리 방공포는 깜박 잊었던 탓이었다.
 
■ 12월13일 03시30분:쿠데타 진압 최종 실패


 이 불행하고도 긴 1979년 12월12일 밤 8시부터 내가 작전 기능을 상실하던 1979년 12월13일 오전 3시30분까지 전투사단급 전투력이 넘는 내 휘하의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나의 부하가 반란군에게 사격을 가한 것은 오직 국방부 옥상에서 있었던 이 한 건뿐이었을 정도이니, 이 부대의 450명 장교 보직을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4년여 수도경비사령관을 하던 차규헌 장군이 ‘하나회’ 사조직 멤버로 구성한 결과임이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두 번째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피격 사건인데 이는 후술하기로 하겠다.
 
훗날 알게 된 쿠데타군의 작전과 병력 이동, 군 장악 실태는 다음과 같다.
12월13일 오전 1시30분을 전후해 노태우 제9사단장이 자기 사단 1개 연대 병력을 이필섭  대령과 안병호 작전참모에게 인솔시켜 구파발을 경유해 중앙청 앞으로 진입시켰고, 황영시 제1군단장도 예하의 제2기갑여단을 이상규 장군에게 인솔케 하여 같은 시간, 같은 경로를 통하여 중앙청으로 진입시켰다.
그리고 12월12일 밤 10시20분에 반란군인 제1공수여단이 수색 방면과 구파발 방면으로 13일 오전 1시경 통과하면 철저히 저지하라고 명령했을 때, 거의 명확하고 자신 있는 대답을 했던 바로 그 박희모 30사단장의 90연대마저 반란군에 가담하여 13일 오전 1시께 서울에 진입했다.

12월13일 오전 2시10분경에는 성남 지역의 제3공수여단과 제5공수여단이 각각 25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성산대교로 진입해 들어와 오전 2시30분경에는 서울 시내가 반란군 수개 사단(10월26일 사건 후 태릉에 계엄사단으로 주둔 중인 박준병이 지휘하는 제20사단 포함) 병력과 전차부대, 공수부대 등으로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보다 6~7배가 많은 반란군 부대가 동원되고 있었다.

 내 요청에 의하여 출동한 윤흥기 장군의 제9공수여단은 보안사령부가 여단사령부에 잔류해 있던 부여단장을 끈질기게 설득하고, 부여단장이 다시 이동 중인 제9여단장을 설득하게 하여, 12일 밤 10시경 출동 도중 모든 임무를 포기하고 원대로 복귀하고 말았다는 것을 사건이 끝난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다.
12월13일 오전 3시경 그렇게도 찾아 헤맸던 노재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때는 이미 반란군 부대에 의하여 서울이 완전 장악되고 있을 때였다. 즉, 반란군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의정부·망우리 방면에서 오는 제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의 서울 진입을 저지할 목적으로 제20사단(10·26 직후 계엄사단으로 양평에서 서울 태릉으로 이동해온 박준병 사단)과 수색에 주둔하던 30사단(사단장 박희모)의 90연대를 태릉과 고려대에 배치하고, 황영시 제1군단장 예하의 반란 부대인 제9사단(사단장 노태우)의 증강된 연대(연대장 이필섭)와 이상규 준장이 지휘하는 제2기갑여단은 서울의 중심인 중앙청 일대에,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반란군에 가담한 제30경비단(장세동 대령) 제33경비단(김진영 대령) 헌병단(조 홍 대령)의 3개 경비단은 경복궁에 배치하여, 기동타격 부대로 활용할 준비를 해놓았다.

 그리고 방송국을 비롯한 서울 시내 중요 시설에 쿠데타 전에 내가 계엄부대로 분대 내지 소대 병력들을 배치해두었는데, 그들을 반란군 병력으로 완전히 교체시켜 증강 배치했다. 또 강남으로부터 진입한 제1공수여단은 국방부와 육본에 배치하고 제3공수여단과 제5공수여단은 장충단과 동국대에 배치하여 기동타격 및 중요 시설 경계 부대로 13일 오전 2시30분경까지 배치하여 서울 일원을 장악하고, 반란 진압 부대의 예상 진입로를 완전 차단하기 위한 배치를 완료한 뒤였다. 진짜 버스 떠나고 난 후에 손 흔드는 격이었다.
 
■ 8시간 만에 이뤄진 국방부장관과의 통화:“너는 왜 싸우려고만 하나?”


 비통한 마음으로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전화를 받았는데 “장태완! 너는 왜 자꾸 싸우려고만 하나?”가 그의 첫마디였다.
 “아니, 장관님! 제가 무슨 병력이 있어야 싸우지요. 저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다만 자체 방어 태세만 갖추고 있잖습니까?”
 “야! 말로 해, 말로!”
 “저놈들이 초소를 유린하고 부대를 점령해 들어와도 말입니까?” 하고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져 “그러면 지금부터 장관님께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내려주시겠습니까?” 했더니 “야! 부대를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 내 지시를 따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것으로 모든 게 다 끝났구나 하면서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던 접견실로 가서 김기택 참모장에게 모든 참모를 집합시키도록 하고, 내 군 생활의 최후를 어떻게 끝마칠 것인가를 생각했다. 몇 명 안 되는 참모들이 모였다.
 “자네들 오늘 밤 고생 많았네. 모든 것은 끝났다. 군인은 승부에 깨끗해야 돼. 특히 오늘 밤의 일은 먼 훗날,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고. 여러분의 문제는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질 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 누가 생각해도 이 중에서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그 즉시 나로부터 총살당했을 것이라는 건 당연한 일이니, 그저 내가 시킨 대로만 했을 뿐이라고 해. 이제 오전 3시를 기해 일체의 전투 행위와 사격을 중지하라! 그리고 한 사람의 희생자나 불상사도 없도록 부대로 잘 복귀시키고, 새로운 지휘관을 잘 받들도록 하라. 짧은 동안이나마 나에게 기합도 많이 받고, 일도 많이 하고, 고생 많이 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전 부대 장병들의 건투와 행운을 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본래 나의 집무실인 육본 일행이 있는 사무실로 건너갔다. 그러고는 “참모차장님! 장관님 지시대로 1979년 12월13일 오전 3시부로 일체의 전투 행위와 사격을 중지시키고 모든 부대에 즉시 원상복귀 지시를 하였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곧 역모자 중 유학성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내가 보고한 내용을 그대로 보고 형식으로 전했다.
 잠시 후 오전 3시10분경 전두환 장군으로부터 윤성민 참모차장에게 전화가 왔다. 언뜻 들으니 국방부장관께서 참모총장·3군사령관·수도경비사령관을 연행해 조사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내용인 듯싶었다.
 오전 3시20분부터 MBC 방송국에 나가 있던 제9공수여단 병력을 비롯하여 서울 일원의 경계 병력을 반란군의 병력으로 교체시키고, 변규수 장군 이하 모든 보안대원을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통금 해제 시간인 새벽 4시를 기해 19개 한강 교량의 바리케이드를 철거하고 통행을 정상화시켰다(시민에 대한 죄책감은 죽을 때까지 속죄할 것임).
 
■ 12월13일 04시30분:체포되어 서빙고로 연행되다

 그보다 조금 전인 오전 3시30분에 소준열 종합행정학교 교장으로부터 노 국방부장관이 삼청동 대통령 공관으로 갔다는 연락과 이희성 장군이 참모총장이 되었다는 전달을 받고, 다시 내 집무실로 돌아와 보니 몇몇 참모들이 남아 있길래 “돌아들 가서 일 보라”고 말하는 찰나 내 집무실로 쓰던 육본 일행이 있는 곳에서 총성이 났다. 그때 우리가 있는 접견실 문이 열리며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이 옆구리를 움켜쥐고 “야! 이놈들이 나를 쏜다” 하면서 피를 흘리며 곧 쓰러질 듯이 들어왔다. 참모들에게 곧 인근 병원으로 모셔가도록 지시하고 그 방으로 들어갔더니, 내가 제일 처음에 총장님 구출 특수 임무를 주어 총장님 공관으로 파견했던 바로 우리 사령부의 헌병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이 장료·사병 10여 명(그중에는 사령관 경호병도 몇몇 보였음)과 함께 M16 소총을 장군들에게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기가 막혀 “야! 이놈들아!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연행하려면 나를 연행하든지, 쏠 것이지 장군님들께 이런 군기문란죄가 어디 있어?” 하고 호통을 쳤더니, 신 중령이 머리를 숙였다.

 “사령관님! 죄송합니다.”
 “누구 명령이냐? 부단장은 누구 명령을 받게 되어 있나?”
 “보안사령관님 명령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제부터 제가 사령관님을 모시겠습니다.”
 “이놈아! 전두환이한테나 가!”
 소리치고 나서 현관 앞으로 내려갔다. 나는 대기하고 있는 경호차에 의해 서빙고라는 곳으로 실려 갔다. 그때가 아마 13일 새벽 4시30분쯤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부덕하고 무능한 지휘관이라 할지라도 이미 모든 상황이 장관에 의해 종결되고, 계엄 조치로서 10·26 이후 방송국 등 각종 중요 시설에 배치되어 있던 기존 병력까지 쿠데타군에 의해 교체 중이던 그 시점에서, 직속 부하들이 지휘관실에 완전무장하여 침입, 총격을 가하며 일부 고급 장성들을 희생시키는가 하면, 직속상관을 체포 연행한다는 것은 군율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자라나는 군 후배들에게 그러한 악습을 남겨주어 어떻게 군을 이끌어 나갈 것인지 옥중에서도 너무나 서글펐다.




<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