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서점에서 〈전태일 평전〉을 샀다. 그 책을 들고 집으로 오면서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두려웠다. 목차에 등장하는 노동자, 근로기준법, 나를 따르라… 이런 단어들이 낯설고 무서웠다. 나는 끝내 그 책을 읽지 못하고 환불했다. 〈천안함의 과학 블랙박스를 열다〉를 읽으며 20여 년 전 느꼈던 그 감정이 되살아났다. 누군가에게는 이 학술서도 참 두려운 이야기겠구나.

2010년 3월26일 백령도 앞바다에서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이 침몰하고 젊은이 4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처참하고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침몰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다국적 민·군 합동조사단이 결성되고, 조사단은 사건 발생 55일 만에 북한이 한 일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조사단의 발표는 오히려 논쟁을 촉발한다. 이후 어뢰추진체의 ‘1번’이라는 글씨와 백색 흡착 물질에 대해서, 북한 무기의 설계도면에 대해서, 수중 폭발을 재현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학술 논문을 발표하고 논쟁을 벌였다. 이 과정은 현상을 좀 더 명확히 설명하는 가설이 무엇이냐를 두고 경쟁하는 일반적인 학술 논쟁과 달랐다.

이 과학 논쟁은 첨예하고 예민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다. 저자가 하는 강연에서, 이 논쟁에 참여한 과학자가 감당해야 했던 정치적 무게에 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과학자들은 조사단의 설명이 타당한지 확인하는 실험을 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그 순간부터 혹시라도 내 전화가 도청되지는 않을지, 정치적으로 탄압받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했다.
 

〈천안함의 과학
블랙박스를 열다〉
오철우 지음
동아시아 펴냄

책은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책을 쓴 목적이 아니다. 저자는 무엇이 진실인가에 앞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말한다. 천안함 침몰에 대한 그 난해하고 복잡한 과학적 근거들을 하나씩 분석하며, ‘우리 사회는 과학적으로 사유하고 있는가?’ 질문한다. 과학적 사유는, 너는 어느 편이냐고 다그치는 세상에 주눅 들지 않는, 이미 굳어진 시나리오와 편 가르기에 맞서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 책의 집요한 서술은 그 용기를 갖기 위해 필요한 인내와 노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이 책의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책을 꼭 지금 당장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어느 날 작은 용기를 내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열일곱 살 막연한 두려움에 도망쳤던 〈전태일 평전〉을 나는 2년 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읽기 시작했고, 그 책에서 만난 스물세 살의 젊은이는 한국인으로서 내게 가장 큰 자부심이 되었다.

기자명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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