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책은 말고, 유난히 꼭 시집을 읽고 싶을 때는 언제일까. 나는 주로 ‘아름다운 언어가 지닌 치유의 힘’을 느끼고 싶을 때 시집을 산다. 사람들이 마구 내뱉는 말들의 공격성에 기가 질릴 때, 언어를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유리잔처럼 곱디곱게 다루는 시인들의 못 말리는 정성스러움이 그리워진다. 그런데 김민정의 시집은 조금 다르다. 물론 그 거침없고 도발적인 언어도 또 다른 아름다움의 줄기이지만, 김민정의 시는 ‘재미있어서’, 정말 재미있어서 읽고 싶어진다. ‘재미있다’는 밋밋한 단어보다는 ‘재미지다’라는 좀 더 차진 표현이 어울리는 이 시집을 펼치면, 곳곳에서 발랄하고 유쾌한 시어들이 은빛 날치 떼처럼 눈부시게 날아오른다.

“우리 은밀히 모이자고 그런 다음/ 광화문 한복판에서 삐라를 뿌리는 거야/ 어때 기막히지?” “아뇨 코 막혀요/ 독서 권장 리플릿을 손으로 나눠주면 되지/ 왜 굳이 하늘에서 삐라로 뿌리자는 거예요?/ 정권 타도라고 대문짝만하게 쓰면 모를까/ 겁도 많으시면서” “일단 저 박근혜가 꼴도 보기 싫어 그러지”(‘자기는 너를 읽는다’). 이런 대화체 속에서는 이토록 무거운 세상을 저토록 가볍게 날아오르는 시인의 발랄함이 부럽다가도, “표준국어대사전을 달달 외워/ 편집자 시험을 준비하는 제자에게/ 괜찮아 너는 시에 통 재능이 없으니까/ 일찌감치 야무지게 말해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스승의 은혜야/ 한마디로 너 잘되라는 어머니 마음”(‘그대는 몰라’)이라는 대목을 읽고 있으면 시인의 평소 말투가 그대로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용감하다. 용감한데 날쌔기까지 하고, 지적이면서도 유쾌하기까지 하다. 뭔가 본받을 만한 ‘샘플 어른’ 없나 하고 국회방송을 봤더니, “어른은 어렵고 어른은 어지럽고 어른은 어수선해서/ 어른은 아무나 하나 그래 아무나 하는구나 씨발/ 꿈도 희망도 좆도 어지간히 헷갈리게 만드는데”(‘어른이 되면 헌책방을 해야지’)란다. 막장에 몰린 분노를 한바탕 웃음으로 역전시키는 괴력이다.

ⓒ문학동네 제공거침없고 도발적인 시를 쓰는 김민정 시인.
이원 시인은 김민정 시인이 “돌려 말하기는 꿈에서도 하지 않으므로”, 삶을 단지 현장에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현장에서 체포”하는 사람이라고 쓴다. 과연 그 현장에서 체포된 삶의 이미지가 텔레비전이나 스크린이 아닌 바로 내 앞에서 꿈틀대는 듯 생생하다. 종로 금강제화 맞은편 가판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특대 사이즈 곰인형을 골라주는 장면처럼. “자기 없이 하루도 못 자니까 자기 없을 땐 밤마다 얘를 껴안고 잘래. 아줌마가 총채로 비닐에 싸인 흰곰을 탈탈 턴다. 여자는 양미간을 찌푸린 채 팔짱을 낀다. (…) 새 물건 없어요? (…) 아줌마가 옆 가판으로 가 특대 사이즈의 흰곰을 하나 빌려서는 다 큰 아이를 업듯 등에 지고 온다. 그 사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건너버린다. (…) 야 이 씨발 연놈들아! 개쌍 연놈들아!” 이 시의 제목이 “‘보기’가 아니라 ‘비기’가 싫다는 말”이라니,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녀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생생한 날것 그대로의 삶을 독자의 눈앞에 들이민다. 우리가 낮에 ‘비기가 싫어서’ 못 본 척했던 삶의 부끄러움을, 깊은 밤의 언어, 날쌘 시인의 언어로 투척한다. 그러니 어쩌랴, 은밀한 죄책감을 곱씹으며, 읽고 또 읽을밖에. 음전한 척하지 않으니, 우아한 척하지 않으니, 그녀의 시어들이 할퀴고 간 내 심장은 더욱 쓰라리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김민정 지음 문학동네 펴냄
삶을 현장에서 체포하다

이런 김민정 시인의 꿈은 자신이 골라놓은 책들과 자신이 디자인한 책장으로 헌책방을 내는 것이란다. “책장도 디자인 해놓은 지 오래이다/ 아직 수종을 고르지는 않았으나/ 상상하자면 달팽이관을 닮은 미끄럼틀 형세다/ 미끄러지자 책과 책 사이에서 미끄러져보자”(‘어른이 되면 헌책방을 해야지’). 제대로 어른이 되면 헌책방을 내고 싶은데, 그런데 언제부터가 어른일까. “근데 나 언제부터가 어른일까 그때가 이때다 불어주는 호루라기 그런 거 어디 없나.”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오늘 하루를 또 열심히, 아니 간신히 견뎌낸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에 사뿐히 머문다. 그녀가 꿈꾸는 미래의 헌책방은 아마도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우리 어른들의 작고 눈부신 놀이터가 되지 않을까.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미끄러지자, 미끄러지자, 책 사이에서, 시집 사이에서 미끄러져보자.

기자명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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