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출판사 직원으로부터 받은 주소를 택시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여기가 맞는데….” 목적지 주변을 뱅글뱅글 돌던 기사는 영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출판사의 치읓(ㅊ) 하나 발견하기 어려운 번잡한 명동 뒷골목이었다. 출판사는 파주 출판단지나 서울 합정동 같은 곳에 있어야 마땅한 무엇 아니었던가. 택시에서 내려 커다란 중국집 간판 앞에서 잠시 망연했다. 그때 중국집 건물 2층 창문으로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한성봉 대표였다. 건물 밖에 굳이 간판을 따로 달지 않았다. 문득 동아시아출판사 SNS에 적힌 한 줄 소개가 떠올랐다. ‘젊은 문화 게릴라 집단.’ 참 적확한 설명이다 싶었다.

올해의 출판사 선정은 ‘올해의 책’을 꼽는 과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쉬웠다. 출판인들이 압도적으로 ‘동아시아’를 꼽은 덕분이다. 동아시아 편집자들도 〈시사IN〉 설문지 답변 작성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여기 우리 이름 써야 하는 거 아니야?” 했을 정도였단다(물론 동아시아가 보내온 답변에는 다른 출판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만큼 열심히 일한 한 해였다. 성과도 있었다. 〈한국일보〉가 주관하는 제57회 한국출판문화상 예심에서는 동아시아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동아시아 책이 너무 많이 언급돼서 일부러 제외해야 할 정도였다는 의미다.

ⓒ시사IN 조남진동아시아출판사는 과학책 출판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출판계 동료들의 평가도 비슷했다. 과학 교양서를 중심으로 인문사회를 넘나들면서 의미와 흥미, 판매까지 고루 담보한 책들을 소개했다.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 〈중력파,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선물〉 같은 책들은 눈 밝은 기획과 흐름을 읽는 발 빠른 출간으로 주목받았다. 뿌리와이파리 정종주 대표는 “우리 출판사가 뭘 하고 있든 동아시아가 ‘먼저’ ‘더’ ‘잘’ 하고 있다. 기획력·기동력·편집력 모든 부분에서”라고 말했다. “과학 교양서 부분에서 국내 최고의 필진을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섭외해 성과를 내고 있다(사월의책 안희곤 대표)”라는 평도 있었다.

동아시아는 올해 18년차에 접어든 중견 출판사다. 대학 국문과 교수였던 한 대표는 1999년 창업 당시만 해도 출판 경력이 전무했다. “마흔 이후에 뭘 할까 고민하다가…. 학교에서 일하는 동안 제가 가장 많이 접했던 게 책이었으니까. 이거나 한번 해볼까, 했던 거죠.” 출판사가 서울 명동에 위치하게 된 이유도 다소 엉뚱하다. ‘말은 나면 제주로 가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라’는 말대로 했다. 처음 사무실을 차린 곳은 서울에서 제일 번화한 강남이었다. 얼마 후 영화사를 차린 친구 따라 명동으로 왔다. 영화사 사무실 한구석을 얻어 더부살이했다. 그러다 그냥 자연스럽게 명동에 정착했다. ‘말 많은’ 출판단지와 조금 떨어져 있는 것도 편하다. 현재의 사무실로 옮긴 지는 10년 정도 되었다. 1층에 위치한 중국집 사장님이 건물주인데 8년 넘게 월세를 안 올리길래 올해는 자발적으로 10만원을 인상했다고.

필자 발굴과 라인업 구축에서 압도적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 블록에 대한 개인적 관심을 출판으로 이어가볼까 해서 지은 이름인데, 과학책(〈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으로 출판사 이름을 알렸다. 우스갯소리로 ‘똥아시아’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창업 전 시장조사를 하면서 감이 오긴 했다. 과학을 교양으로 읽는 게 자리 잡은 일본과 달리, 한국 서점에서 과학책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다.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동아시아 하면 저자 이름으로 책 제목을 짓는 걸로도 유명하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때부터 이어져온 일종의 전통이다. 올해 나온 책에도 〈김상욱의 과학공부〉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박경미의 수학 N〉 같은 제목이 붙었다. “사실 국내 저자의 과학책은 과학적 글쓰기 전통이 유구한 서양과는 상대가 안 됩니다. 박정희 시대 과학은 경제발전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영향이 크고요. 한국에서 이른바 ‘과학적 글쓰기’가 가능해진 게 1970년대 전후 태어난 연구자들부터라고 봐야 해요. 과학을 인문·철학적 안목으로 보고 글을 쓰는 세대가 막 형성된 건데, 이 국내 저자들을 계속 알리고 브랜딩해야 합니다.”

한 대표가 보기에 외국 필자의 좋은 책은 누가 봐도 보고, 누가 내도 낸다. 하지만 국내 필자를 발굴하고 라인업을 구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동아시아가 요즘 무엇보다 주력하는 것은 일종의 융합이다. 과학을 인문·사회과학 혹은 예술과 접목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과학 지식’보다는 ‘과학적 사고방식’에 더 방점을 찍는 식이다.

2016년 한 해 동안 동아시아는 스무 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올해 초 편집팀 식구도 두 명 늘어 여덟 명이 됐다. 출간된 책의 목록을 쭉 보면 감탄스럽다. 〈중력파,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선물〉이 대표적이다. 지난 2월11일 아인슈타인에 의해 예견된 중력파의 직접 검출이 100년 만에 성공했는데, 그 직후 바로 중력파 발견의 뒷이야기를 담은 이 책이 출간됐다. 중력파에 관한 국내 유일무이한 책이자,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이고, 무엇보다 국내 저자가 쓴 책으로 주목받았다.

연말에 나온 〈사이언스 빌리지〉의 경우는 동아시아의 2016년을 화려하게 마무리 짓는 책이다. 반년 가까이 공들여 준비했다. 랜들 먼로의 〈위험한 과학책〉(시공사, 2015)이나 앤디 그리피스의 〈13층 나무집〉(시공주니어, 2015) 같은 책들이 국내 저자를 통해서도 구현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낸 책이기도 하다.

대중과학서 시장은 규모가 작은 대신 충성 독자 수가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다. 과학 자체가 계속 발전을 거듭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책은 그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독자 역시 ‘단 한 권의 책’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출판사의 부단한 업데이트가 요구되는 까닭이다. 올 한 해 그 최전선에 동아시아가 있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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