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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언어에 귀가 트이기 시작했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7년 01월 04일 수요일 제4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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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집자의 말마따나 2016년 출판계는 “페미니즘 책이 팔렸다”로 요약 가능하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등 계속 이슈를 만들었다. 특정 책 한 권이 독식하는 구조도 아니었다.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인문·사회과학 서적뿐만 아니라 그래픽노블이나 소설처럼 다양한 장르의 책이 고르게 사랑받았다(72~75쪽 기사 참조).

국내서 중 출판인들에게 최다 추천을 받은 책은 ‘성차별 토픽 일상회화 실전대응 매뉴얼’을 내세운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봄알람)이었다. 이 책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막말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라는, 대학원생 이민경씨의 고민에서 출발했다. ‘긴급 여행회화 100선’ 같은 용도를 떠올렸다. 여성혐오와 성차별이 난무하는 대화에서 호신술 구실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시사IN 신선영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서적이 더욱 주목받았다. 한 추모객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이론서가 아닌 실용서라는 점과 더불어 출간 과정도 눈길을 끈다. 책을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한 이씨와 친구들이 찾아간 곳은 출판사가 아니었다.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텀블벅을 통해 제작비를 투자받았다. 겨우 3주 만에 2600여 명이 4300만원을 모아주었다. 이후 소규모 독립 서점을 통해 유통되던 책은 온라인 서점과 대형 서점에도 입고됐고, 봄알람이라는 ‘페미니즘 전문 출판사’ 창업으로까지 이어졌다. 6월 출간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은 약 2만 부가 팔렸다. “더할 나위 없는 페미니즘 입문서”라는 평이다.

지난 9월 봄알람은 이민경씨의 두 번째 책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외롭지 않은 페미니즘>이라는 워크북을 펴냈다. 내년 출간 라인업도 이미 짜였다. 메갈리아와 여성철학사를 다룬 책 두 권을 준비하고 있다. 메갈리아 관련 책은 <혐오발언>(알렙)의 번역자 유민석씨가 저자로 나섰다.

페미니즘은 연결될수록 강해졌다


봄알람의 이두루 편집자는 “출판계는 여성 노동자 비율이 80%이고, 2030 세대 여성 독자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내는 출판사로서 봄알람이 성공적 첫발을 내디딘 한 해였다”라고 자평했다. 동료 출판인들이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을 올해의 책으로 추천한 이유도 맥락을 같이한다. 코난북스 이정규 대표는 “출간 동기부터 내용까지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라는 페미니즘의 선언을 실현한 책이다”라고 말했다. 나무연필 임윤희 대표는 ‘국내 저자’의 페미니즘 서적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 책은 올해 출간된 페미니즘 책 중 유일한 국내서다.

대형 참사 앞에서 출판계의 사회적 책임과 고민도 계속됐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가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다. 유족들은 길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았다. 세월호는 아직도 인양되지 않았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세월호 참사 관련 책이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백서 성격을 겸한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힘)과 소설 <거짓말이다>(북스피어)는 ‘잊지 않겠다’는 맹세를, 말이 아닌 몸으로 그리고 글로 보여준 책이라는 평을 받았다. 북콤마 임후성 대표는 <세월호, 그날의 기록>에 대해 “‘있는 그대로’와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이 두 가지에 철저한 책이다”라고 말했다. 어크로스 김형보 대표 역시 “단순히 기록물을 묶은 게 아닌, 탐사 취재의 전형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일반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편집·집필되었다”라고 평했다. 세월호 민간 잠수사를 다룬 소설 <거짓말이다>에도 찬사가 쏟아졌다. 사월의책 안희곤 대표는 “김탁환 작가의 끈질긴 추적이 돋보이는 기록문학의 성과다”라고 말했다. 이상북스 송성호 대표는 “민간 잠수사의 눈을 통해 이 시대 권력의 거짓말을 깊이 바라본다. 문학의 힘은 시대성을 반영하는 데 있다”라고 평했다.

한편으로는 누군가 떠난 자리마다 살아갈 힘이 고였다.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의 연재물인 부고 기사를 추려 모은 책 <가만한 당신>(마음산책) 역시 출판인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최 기자는 이 연재를 통해 기존 한국 언론이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부고 기사의 ‘격’을 높였다. 책의 꼴을 갖추면서 최 기자가 쓰고자 했던 글의 ‘지향’ 역시 더욱 분명해졌다. 서른다섯 명의 부고를 통해 인권과 페미니즘, 표현의 자유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인문서의 새로운 유형을 보여줬다는 평이다.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의 말마따나 “가히 교양인을 위한 종합선물세트”다. 봄날의책 박지홍 대표는 “오랫동안 귀 기울이고 눈 열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사람들을 차곡차곡 빠짐없이 불러내 그들의 삶을 기억하게 했다”라고 말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냉소를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순간만은 접을 수 있었다. 참담했던 시간들에 보내는 뜨거운 위로 같은 책”이라는 한 편집자의 말 역시 이 책의 필요를 잘 보여준다.

ⓒ시사IN 조남진
올해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는 책이 여러 권 출간되어 출판인과 독자에게 호평받았다.
<미움받을 용기>(인플루엔셜, 2014) 열풍의 다음 주자로 출판인들의 눈길을 끈 책은 <자존감 수업>(심플라이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주눅 들고, 비관적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라는 평이다. <자존감 수업>은 모든 심리 분야 책에서 한 번 이상 꼭 나오는 단어인 자존감이라는 평범한 키워드도 어떻게 기획되느냐에 따라 트렌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글 쓰는 정신과 의사’로, 블로그를 통해 사람들과 적극적인 소통을 하는 ‘윤답장 선생’으로도 유명한 저자 윤홍균씨를 필자로 탐내는 편집자도 있었다. “새로운 심리학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진심으로 독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어 하는 저자의 정성이 느껴진다”라는 이유였다.

이 밖에 “가독성을 높이는 편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책”이라는 평가를 받은 양정무의 <난생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전 2권, 사회평론)와 “‘네임드’만 찾는 인문사회 출판 환경에서 돋보인 젊은 사회과학도” 천주희의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사이행성), 김정선의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유유),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창비, 42~43쪽 기사 참조)도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책 국내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철학자 강유원의 고전 강의 3부작 완결편인 <철학 고전 강의>(라티오)는 “자식을 넘어 손주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은 고전 강의 시리즈의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책 번역서 부문에서도 페미니즘 책은 눈에 띈다. 올해 2월 첫 책을 내기 시작한 신생 출판사 사이행성(66~67쪽 기사 참조)이 펴낸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창비)가 목록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두 권 모두 불편하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페미니스트로 살겠다고 다짐한 모두를 응원하는 책”이라는 평이다.

유튜브에서 250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은 TED 강연을 책으로 옮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경우, 단행본이 되기 쉽지 않은 적은 분량의 원고(50여 쪽)이지만 얇고, 깊고, 재미있다는 평이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가 2016년 페미니즘 돌풍의 시작을 알렸다면, <나쁜 페미니스트>는 올해를 상징하는 제목과 내용으로 페미니즘 대중화에 기여했다. “독서가 곧 실천임을 증명하는 책 가운데 하나”로 ‘페미니즘 원년’의 최고 흥행 서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잠재적 페미니스트들에게 해방감을 안겨줬다”라는 이유에서다.

독서가 곧 실천이었던 한 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당사자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담겨 있는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반비) 역시 출판인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이 책은 1999년 4월 미국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쓴 회고록이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가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출판인들 역시 처음에 이 책의 제목과 소재를 보고 ‘팔릴까?’ 의아해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비난에 앞서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자의 간절함이 통했다라는 분석도 나온다. “끔찍한 폭력과 살인 사건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우리가 편견을 내려놓고 대해야 할 또 하나의 ‘인간성’을 제시해준다” “손쉬운 단죄와 용서 구함 대신 진정성 넘치는 반성과 성찰의 기록”이라는 게 공통된 평가였다. 이 책의 번역자인 홍한별씨의 공이 컸다는 의견도 있다(70~71쪽 기사 참조).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철저히 사실에 기반한 글이라 까다로웠을 텐데 매끄럽게 번역했다.”


책 내용보다 양경수씨의 삽화가 화제를 모은 책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오우아)는 기획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올해의 제목’ 분야가 있다면 1등으로 선정하고 싶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 세대’의 새로운 회사학이라는 평도 있었다. 문학동네 염현숙 대표는 “외서를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발하고 파격적인 그림을 새로 넣어 국내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라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찬사를 받았던 화제의 책,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김영사)도 빼놓을 수 없다. ‘소문난 잔치에 정말 먹을 게 많았던’ 책이라는 평이다.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석으로 학제 간 통섭의 글쓰기 전범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이 밖에 “아우슈비츠 희생자가 아닌 인간 프레모 레비를 발견할 수 있었던 책” <고통에 반대하며>(북인더갭), “시한부 젊은 의사의 에세이라는 소재의 비극성만큼이나 저자 특유의 문학적 필치가 돋보인” <숨결이 바람 될 때>(흐름출판)도 출판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현대문학), <지리의 힘>(사이),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책세상)도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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