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경험과 상상’ 배우 김한봉희씨(32)는 11월12일부터 매주 토요일 광화문역으로 가는 5호선 지하철 안에서 진한 아이라인을 그렸다. 배우 김한봉희에서 ‘광화문 최순실’로 바뀌는 화룡점정의 순간이다. 그녀에게 지하철 5호선은 분장실이다.

무대는 촛불집회 현장. 김한봉희씨는 거리에서 〈시사IN〉 조남진 기자가 찍은 사진 속 최순실씨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흰 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올린 뒤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다. 가장 중요한 건 표정. 김한봉희씨는 눈이 아플 정도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은 개·돼지다.”

‘메소드 연기(배우가 극중 배역에 몰입해 그 인물 자체가 되어 연기하는 방법)’가 통했다. 촛불 시민들은 ‘광화문 최순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김한봉희씨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리고 카메라 셔터가 터졌다. 공중파 방송을 비롯해 많은 언론이 광화문 최순실을 화면에 담았다. 김한봉희씨는 “내가 그렇게 똑같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광화문 최순실은 ‘박근혜 퇴진 새누리당 해체 예술행동단 맞짱’이 기획한 만평 퍼포먼스의 일부다. 배우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가면을 쓰거나 최순실로 분장하고 신문에 나오는 만평처럼 풍자적인 장면을 재현했다. 김한씨는 “처음 기획할 땐 이렇게 파급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예술가로서 의미 있는 활동을 재미있게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사진을 따라 하고, 그다음에는 죄수복을 입고, 세 번째는 포승줄로 묶고, 다음에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뒀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그녀와 함께 예술행동단 맞짱에서 활동하는 하지숙 연출가는 “박근혜 대통령 가면을 썼던 배우는 매주 집회가 거듭될수록 시민들의 시선에서 살기를 느꼈다고 하더라. 그만큼 반응이 점점 격해졌다. 촛불의 힘이 커지면서 권력자를 혼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고조되는 걸 느꼈다”라고 말했다.

매주 촛불집회가 거듭되면서 광화문 최순실을 만난 시민들의 반응도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어머!” 하고 놀라거나, 멀리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너무 닮아서 놀라는 표정으로 10초 동안 정지 화면처럼 김한씨를 쳐다보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가까이 와서 셀카도 찍고, 폭소를 터뜨리고, 심지어 때리려는 시늉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희열감에 더 ‘표독스럽게’ 사람들을 째려봤다.

광장에서는 지나가던 시민도 예술가

이번 촛불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문화적으로 즐길 거리가 풍부했다는 점이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이자 예술가인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다양한 예술 행동을 벌였다. 예술행동단 맞짱도 그런 예술가들이 모인 느슨한 집결체다. 현재 예술가 60여 명이 카카오톡 방을 만들어 아이디어와 활동 계획을 공유한다. 정기적인 모임 날짜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집회 때면 얼굴을 보게 된다.

연출, 배우, 미술, 음악, 춤 등 전문 분야도 다양하다. 안무가는 정부의 늘품체조를 풍자한 ‘하야체조’와 ‘하야춤’을 만들어 선보였다. 음악인은 집회에서 다 같이 부를 노래를 만들거나 개사했다. 미술인은 탄핵이 국회에서 가결된 다음 날인 12월10일 촛불집회에서, 탄핵 가결 기념 판박이 문신을 만들어 참가자들에게 무료로 선물했다. 김한씨도 매주 토요일 지하철에서 ‘최순실 화장’을 하고, 집회에 나가서 촛불을 들고,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며 공연을 펼쳤다.

이런 예술행동은 시위의 문턱을 낮추었다. 집회는 무조건 위험하거나 힘들기만 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깼다. 선뜻 거리에 나오기를 꺼리는 사람들도 이번에는 축제에 참여하듯 시위에 나섰다.

예술행동단 맞짱은 단체 이름처럼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새누리당 해체’가 이루어질 때까지 꾸준히 활동할 예정이다. 탄핵 이후 집회에서는 예술 행동에 직접 참가하려는 시민이 많아졌다. 하지숙 연출가는 “예전에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대다수 시민이 듣는 구도였다면, 탄핵 이후에는 지나가던 시민들이 ‘우리도 해도 돼요?’라고 묻고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주체가 되려는 욕망이 강하다. 예술가들도 국민의 한 명으로 집회에 참가했듯이, 예술을 좋아하는 누구나 맞짱과 함께할 수 있도록 열어두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한씨는 이전에도 정치적 이슈에 관한 거리 퍼포먼스를 여러 차례 했다. 최근에는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을 비판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민미술관 앞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마우스를 들고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박근혜 정부가 만들었다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도 이름이 올랐다. 김한씨는 집회 자체가 100만명이 함께하는 하나의 공연 같았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행진 자체도 무대 위 배우들의 몸짓처럼 예술적인 단체행동이다. 촛불이 일렁이는 장면 자체가 예술 아닌가.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마치 다 같이 큰 공연을 해낸 배우들이 된 것처럼 유대감을 느꼈다. 지난주 개인 스케줄로 집회에 참여하지 못했더니, 마치 ‘펑크’ 낸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웃음).”

기자명 신한슬 기자 다른기사 보기 hs5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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