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2016년 후반부를 장식한 것은 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해 전국에서 켜진 촛불이었다. 광화문 촛불시위 현장을 수놓았던 무수한 촛불들은 현재 세계에 대한 저항, 그리고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의미한다고 나는 본다. 각각의 촛불들은 현재를 넘어서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세계에 대한 ‘집단적 희망’과 ‘개인적 희망’이라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이란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의 공간이다.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됨의 의미가 사라진 삶, 즉 지옥의 삶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 시간이란 사실상 달력 속에서 규정된 것일 뿐, ‘나’의 주체적 개입이 없다면 오늘이란 어제의 반복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두 세계, 즉 일상적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이미(already)의 세계’와 경험하지 못한 ‘아직 아닌(not-yet)의 세계’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미의 세계’에만 침잠되어 살아가는 이에게 새해란, 달력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진정한 새로운 해란 나 속에 ‘아직 아닌 세계’에 대한 구상과 실현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품고 있을 때에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인간이 지닌 동물성을 넘어서서 인간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축의 시간대를 구상하고, 과거와 미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현재를 살아간다는 점이다. 인간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한 꿈꾸기를 하는 존재이다. 이 ‘낮꿈’은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강렬한 희망이 담긴 변혁적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인류의 문명을 형성해온 동력이기도 하다.

칸트는 실천이성의 가장 중요한 세 질문 중 하나를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라고 제시한다. 인간이란 희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희망이란 무엇이며, 무엇에 대한 희망을 가져도 되는 것인가. 우리가 씨름해야 할 물음들이다. 희망은 어떤 것을 이루고 싶어 하는 단순한 소원이나 욕망과는 다르다. 소원이나 욕망과는 달리, 희망이란 희망자의 사유와 행위를 통하여 희망하는 표상에 대한 주체적 개입이 요청된다. 이 점에서 ‘희망하기’란 자동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연습하고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희망하기란 하나의 틀로 고정되어 정형화될 수 없는 것이며, 끝없는 상상력과 구체적인 실천력이 지속적으로 요청된다는 점에서 예술이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루고 싶어 하는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구상해내고, 그 희망하는 세계를 이루어내는 데에 무엇이 요청되는가를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사IN 윤무영

희망하기란 한 개별인의 개인적 구상이고 결단으로 형성되지만, 동시에 타자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사건이기도 하다. 즉, 희망하기란 나의 결단만이 아니라, 종종 타자의 지지와 제도적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개인적 희망과 집단적 희망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의 근거는 찬란한 승리의 보장이 아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낮꿈을 꾸면서 ‘홀로-함께’ 그 세계를 이루어내고자 씨름하는 현장 바로 그 한가운데에, 희망의 근거가 있다. 결국 좋은 희망이란 나 자신은 물론 타자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을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을 지지하며, 새로운 힘을 내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살아보고 싶은 세계를 탐구하기

희망하기를 배우는 것이란 우선적으로 자신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삶에서 살아보고 싶은 세계가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지금의 나’만이 아니라 앞으로 ‘되어갈 나’의 잠재성을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지금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표상은 나 자신만이 아니라, 타자의 안녕까지 포괄하는 세계로 이어져야 비로소 그 진정성을 확보하게 된다. ‘나’ 속에 ‘희망’이라는 이름의 촛불이 꺼지지 않고 끊임없이 타오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한 존재가 인간으로서 살아감의 의미를 보다 충일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며, 달력 속의 새해를 진정으로 새로운 해로 맞이하는 조건일 터이다. 절망적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그 절망 한가운데에서 더욱 치열하게 더 나은 미래 세계를 향한 시선을 지켜내는 것, 그 시선의 이름은 희망이다. 그 희망의 촛불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한, 어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암울한 지옥이 아닌 빛나는 생명 세계를 창출하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희망하기야말로 인간됨을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촛불은 켜져 있는가.


기자명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대학,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