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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서 물을 빼자 신라가 드러났다

안압지는 674년에 건설한 신라시대 연못이다. 1974년 안압지 준설공사를 했는데 발굴 조사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급히 발굴 조사를 벌였다. 신라시대 목선도 나왔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제4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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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천년 왕성 월성의 동쪽에 자리 잡은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 건설한 연못이다. 당시에는 월지(月池)라 불렀다. 안압지 주변에는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가 거주하는 공간인 동궁이 있었다. 군신이 함께 연회를 즐겼을 임해전도 있었다. 신라가 고려에 흡수되어 왕국의 영화가 사라진 뒤 안압지는 황량한 연못으로 방치되어왔다. 못을 둘러싼 테두리도 세월의 더께에 묻혀 온데간데없었다.

1971년 경주관광개발종합계획이 수립되던 당시 안압지는 주요 개발 대상 유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경주사적관리사무소(당시 문화재관리국 산하) 측은 발굴 조사도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1974년 11월부터 곧바로 안압지에 대한 준설 작업(물속의 토사를 파내는 일)에 돌입했다. 대신 사적관리사무소는 직원 고경희씨를 준설 현장에 파견해 유물이 나오는지 여부를 지켜보도록 했다. 요즘 발굴 현장에서 쓰는 용어로, 소위 ‘입회 조사’ 방식이다. 당시 경주사적관리사무소장 정재훈의 증언이다.

“처음에 사적관리사무소가 준설사업을 했다. 요즘 같으면 ‘간이 지표조사’ 같은 걸로 (발굴 조사 작업을) 끝내려고 한 거지. 실제로 그땐 호안(연못 테두리)도 안 보이는 상태였거든. 처음에 우리가 물을 빼고 안압지를 준설할 때는 (현장에 고경희 등 사적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있었는데) 그 직원들로는 안압지 발굴 조사를 감당 못하겠더라고. 지금도 안압지 발굴에 대해 나는 미안한 점이 많다.”

ⓒ연합뉴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문무왕 14년(674년)에 안압지를 만들었다. 못 가운데에 3개 섬을 만들었고 못 주변에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다.

사적관리사무소가 작업 초기 단계에서는 안압지 발굴을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준설을 하다 보니 엄중한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보상화문전(꽃문양을 넣은 벽돌), 난간 등의 건물 부자재, 토기 같은 중요한 유물이 마구 나왔기 때문이다. 그제야 안압지에 고인 물을 모두 뺐다. 당시 황남대총 발굴이 한창이었는데, 그곳의 조사단 일부를 안압지 쪽으로 긴급 차출했다. 발굴 조사를 다시 실시하는 등 ‘안압지 사업’을 크게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상황을 문화재관리국의 <안압지 발굴 조사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준설 작업 중 예상외의 유물이 출토·수습되어 준설에 앞선 발굴 조사의 필요성을 느껴 일단 준설 작업을 중지하고 금일(1975년 3월25일)부터 98호 고분(황남대총) 발굴조사단(단장 김정기 박사)의 단원 중 별도로 차출하여 안압지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고, 이에 앞서 관계관이 참석한 가운데 개토제(開土祭·발굴을 고하는 의식)를 올렸다. 호안석축(護岸石築·연못가를 돌린 돌벽)을 확인키 위하여 4개 처의 위치에 따라 다소 융통성을 주어 동으로 6~8m의 탐색 갱(유물 확인을 위해 파는 구덩이)을 설정하였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주 안압지 발굴은 대략 1년9개월 만인 1976년 12월30일 완료된다. 발굴 조사는 안압지를 연못 자체와 주변 건물터 등 두 군데로 나누어 실시했다. 연못에 대한 조사에만 연인원 2만8903명이 투입됐다. 그 결과 드러난 안압지의 둘레(호안석축으로 경계 지어진)는 1005m로 면적 역시 1만3908㎡(4238평)에 달했다. 또한 연못 위에 작은 섬 세 개가 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안압지는 완전히 보존된 것으로만 유물 1만5023점을 토해냈다. 그중 일부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서 전시 중이다. 안압지 유물은 대부분이 연못 진흙에서 발굴된 것들이라 보존 상태가 좋다. 더욱이 상당수가 ‘생활 유물’이라 신라 당대의 생활사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증거물로 평가된다.

신라 목선 부서지자 발굴 책임자가 사표 써

황남대총 발굴 현장에서 안압지로 차출되었던 윤근일(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은 이런 유물을 보존하느라 고충이 컸다. 가장 어려운 일은 발굴 인부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하루 200명 이상의 발굴 인부가 그 넓은 안압지 터에 투입됐으니, 기껏 수습한 유물이 밖으로 유출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로 그런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퇴근하는 인부들 도시락까지 검사했다”라고 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975년 경주 안압지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목선을 인부들이 옮기고 있다.
당시 안압지 발굴단장 격이었던 김동현 역시 위기를 겪었다. 안압지 발굴 작업이 시작된 지 20일 정도 지난 1975년 4월16일, 연못 밑바닥에서 드러난 6.2m 길이의 목선 한 척 때문이었다. 발견 당시 이 배는 “연못 동안(東岸) 임해정(臨海亭)으로부터 20m 서쪽 지점에 석축 밑 수중 지하 바닥층에서 동서로 전도된 상태로 선두(船頭·뱃머리)를 동, 선미(船尾·배꼬리)를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발굴단은 습기 보존 차원에서 목선을 비닐과 가마니로 덮은 채 기초 조사를 시행했다. 발견 시점으로부터 9일 뒤인 7월25일에는, 목선을 현장에서 들어내 인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작업은 취재진에게도 완전히 공개되었다. 그날의 발굴 일지만 보면, 목선의 이동 과정은 꽤 순조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보습 처리했던 비닐을 벗기고 깨끗이 세척한 다음 목선 밑에 받침목을 넣고 인부 수십명이 살짝 들어서 연못 밖으로 이동하였다. 이동된 목선을 세 부분으로 해체하면서 움직이지 않게 솜으로 잘 싼 다음 박물관 지하실에 트럭으로 서서히 옮겨 갔다. 옮긴 목선을 다시 조립하여 맞춘 다음에 비닐 상자로 곽을 짜서 보존처리하여 두었다.”

실제로는 매우 아찔한 사고가 발생했다. 발굴단 처지에서, 부서지기 쉬운 재질에 어느 정도 이상의 무게와 크기가 있는 유물을 옮기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다. 자칫 오랜 세월을 어둠 속에서 견뎌온 유물이 이동 과정에서 파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압지 밑에서 발견된 목선도 그럴 위험이 컸다. 안압지 발굴 책임자인 김동현도 이 때문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나름 묘안을 짜냈다. 그의 증언을 풀어보면, 우선 목선 중간 부분의 밑에 깔린 토사를 파냈다. 다음엔 그 빈 공간에 지지대를 만들어넣고 목선을 받친 뒤 선미와 선두 밑의 토사를 다시 야금야금 걷어냈다. 이런 작업을 끝내고 나니, 목선은 중간 부분만 지지대로 받쳐진 채 공중에 뜬 꼴이 되었다. 이제 받침대를 목선 아래로 넣어 들어올리면 된다.

그러나 받침대에 목선을 얹어 안압지 밖으로 끌어내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경사진 곳을 오르는 도중에, 위에서 끄는 사람들과 밑에서 미는 사람들이 힘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바람에 받침대 자체가 휘어져버린 것이다. 결국 목선은 부러지고 말았다. 지켜보던 기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김동현은 심정이 어땠을까? “그 자리에서 사표를 작성했다. ‘발굴 중에 귀중한 목선을 파괴시켜서 책임을 지고 본직을 사직함’이라 써서 우편물로 직원을 시켜서 부쳤다.” 하지만 김동현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나중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까지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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