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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열기 식자 ‘어둠의 세력’ 꿈틀

1987년 6월 항쟁의 열기는 뜨거웠다. 7월에서 9월까지는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후에는 ‘어둠의 세력’이 조장한 지역감정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야권은 분열되었고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2월 28일 수요일 제4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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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전,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1987년 6월 항쟁은 오늘의 6공화국의 모태였다. 네가 촛불시위에 나가서 어마어마한 인파에 놀랐던 것처럼, 1987년 6월의 한국 사람들은 불의와 독재에 맞서서 용감하게 일어섰고, 싸웠고, 마침내 독재 정권의 항복을 받아냈단다. 이번 촛불시위를 두고 ‘명예혁명’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29년 전에도 비슷한 찬사가 쏟아졌어. 당시 시사 잡지 <월간 조선> 8월호의 6월 항쟁을 취재한 특집에는 ‘6월 평화 혁명의 대(大)드라마’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니까.

그 항쟁의 끝에 체육관에서 독재자 전두환으로부터 다음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은 노태우 후보는 ‘6·29 선언’을 통해 국민들이 목 놓아 요구하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한 민주화 조치들을 수용하겠다고 밝혔어. 본인 스스로 “나는 완전히 발가벗었다”라고 할 만큼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었어. 세상은 바뀔 것 같았고 국민은 승리한 줄 알았지. 하지만 6·29 선언은 한 싸움의 끝이되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이었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중장비를 동원해 시위를 하고 있다.
먼저 이른바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게 시작됐다. 7월에서 9월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노동쟁의 사태를 일컫는 말이야. 언젠가 얘기한 적 있는 것 같은데 당시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매우 열악했어. 이를테면 요즘 울산에서 현대중공업 공장 정규직 노동자는 단연 1등 신랑감이지만, 당시는 공장 정문에서 두발 검사를 받고서야 회사 문을 들어갈 수 있었던 신세였다면 이해가 될까? 그런 상황을 딛고, 기나긴 침묵을 깨고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폭발한다. 민주노조를 만들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킬 임금을 요구하며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눈보라 날리는 서울 철로 위’(민중가요 ‘해방을 향한 진군’ 중)를 넘어서 가내수공업 공장과 중국집 주방장과 배달원까지도 일어났던 게 노동자 대투쟁이야. 아빠는 개인적으로 6월 항쟁보다도 그 후 노동자 대투쟁이 우리의 삶을 더 많이 바꿨다고 봐. 6월 항쟁은 대통령 뽑는 방식을 바꿨을 뿐이지만 노동자 대투쟁은 우리 사회를 뿌리로부터 흔들었고 이후의 변화가 오히려 더 클 테니까.  

하지만 노동자 투쟁은 오래가지 못했어. 어쨌든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했고 16년 만에 되찾은 대통령 직선제란 대단한 매력을 지닌 단어였단다.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보다는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가졌어. 거기에 당시 야당 지도자로 전두환 정권에 맞서 한 몸처럼 싸웠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행보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초미의 관심사가 됐지. 한창 투쟁하던 시절에는 정치적 욕심이 없다고 강조하며 자신이 양보하겠노라 다짐하던 그들이었지만 막상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점차 그 약속은 빛을 잃어갔단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지지자들도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로 단일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팔뚝질하고 급기야 멱살을 잡기 시작했어. 이 틈을 파고든 ‘음지’의 사람들이 있었단다.

그해 여름에 특이한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다. <동교동 24시>라는 제목의 책이지. 동교동은 김대중의 집이 있던 동네였고, 저자인 함 아무개씨는 그 경호원으로 있었다는 사람이야. 김대중을 악의적으로 왜곡·공격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는데 이 책이 전국적으로 특히 영남 지역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단다. 아빠가 다니던 부산에서 학교 문방구에도 ‘<동교동 24시> 있음’ 팻말을 걸고 책을 파는 걸 봤으니까.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유력한 정치인을 일방적으로 험담하는 책이 왜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아빠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첫째, 그 험담을 믿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 둘째, 그 믿음을 조장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었다는 것.

ⓒ연합뉴스
1987년 대선에서는 야권이 분열되면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어둠의 세력’이 믿기지 않는다면 에피소드를 하나 더 얘기해줄게. 너도 알다시피 김대중은 호남 지역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지. 어느 날 이웃집 아저씨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구나. “부산 남바(넘버) 달고 광주 갔더만 주유소 주인이 나와가 김대중 선생님 만세 세 번 부르면 넣어준다 하능기라. 그래서 만세 부르고 왔다 안 하나.” 그랬을 리도 없고, 지금 들으면 우습기까지 한 이 말을 아빠는 여러 사람에게 들었어. 아빠가 들었던 이 ‘괴담’의 주인공만 해도 수십명이고, 또 주위에 그 말을 안 들어본 사람이 없었어. 여기에 따르면 하필이면 그해 가을, 부산 시민 수천명이 차를 몰고 전라도를 방문했고, 또 하필이면 기름이 떨어져, 하필이면 돈도 마다하는 ‘김대중 광신도’ 주유소를 약속한 듯 방문했다는 기적 같은 결론에 부딪치게 되지. 이걸 퍼뜨리고 조장한 건 누구였을까?

1987년 12월은 스산하고 추웠다

이런 어둠의 세력들의 활약 속에 끝내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정치 거인은 갈라서고 말았고 한때 어깨 겯고 싸웠던 동지들은 원수보다 더한 사이가 되어갔단다. 김영삼 후보는 광주 유세를 갔다가 김대중을 부르짖는 군중이 몰려 연단이 기우뚱하자 대한민국 만세만 부르고 내려와야 했지. 그 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연단에 올라가서 제발 이러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김대중을 악착같이 외치는 군중들에 묻혔어. 정말로 김대중 후보를 ‘애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아빠는 요즘은 그 장면에서도 ‘어둠의 세력’을 떠올리게 돼. 텔레비전에서 이걸 지켜보는 부산 어른들 사이에 ‘전라도 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곳곳에서 화톳불로 타오르는 걸 봤으니까.

하나만 더 얘기해보자. 1987년 12월10일은 노태우 후보가 전주에 오는 날이었어. ‘광주 학살의 원흉’ 노태우의 전주 유세를 저지하겠노라고 벼르고 있던 전북대학교 총학생회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난다. <새전북신문>의 ‘전북 민주화운동사’ 실록 2006년 8월21일자에 따르면 그는 ‘민정당 청년 조직 책임자’였어. 그는 총학생회장 이하 간부들을 만나 “우리 쪽 대응이 이 정도이니 경거망동 말라”라면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해. 으름장만 놓은 게 아니라 유세 현장의 경비 배치도 등까지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이게 무슨 뜻이었을까. 단지 이 정도니까 감히 어쩔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였을까. 제발 와서 깽판 쳐달라는 미끼였을까.

노태우 후보의 유세가 시작되기 전 일대 공방전이 펼쳐졌어. 학생들은 연단을 향해 돌진을 시작했고 경찰은 죽을힘을 다해 막았지. 그런데 이 상황을 방송사 카메라는 ‘부감샷’으로 찍어대고 있었어. 부감샷이란 높은 곳에 올라가서 현장을 잡는 그림을 말해. 마치 중세 시대의 전쟁이라도 벌이듯 시위대 수백명이 각목을 들고 경찰의 벽에 맞부딪치는 스펙터클이 펼쳐졌고, 그 영상은 전국의 텔레비전으로 득달같이 배달됐지. 이게 다 과연 우연이기만 했을까? 물론 뭔가 그림이 펼쳐질 것이라고 예측한 기자의 선견지명일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렇기만 했을까?

1987년 6월은 정말로 뜨거웠고,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차오르는 시간이었어. 하지만 그 후 이어진 가을과 겨울은 매우 스산하고 추웠다. 그리고 그해 12월 대한민국은 6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 ‘광주 학살의 원흉’이라고 불리던 군인 출신 노태우 후보를 선택하게 돼. 네가 본 2016년 11월과 12월은 우리 한국 현대사에 길이 빛날 기억이야. 그 감동이 1987년처럼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누가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이 사회를 바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깊기를 바라고, ‘어둠의 세력’에 휩쓸려 이성을 잃고 조종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의 감동이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네게 ‘희망이란 이런 거란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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