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를 앞둔 아이와의 대화이다. “교과서라도 읽어보는 게 어때?” “괜찮아. 대충 알아.” “정확히 알면 좋지 않아?” “뭐가 좋아?” “(시험에서) 안 틀릴 수 있잖아.” “음… 난 한 80점만 받으면 되는데?” 말문이 막혔다. 아이의 얼굴에서 ‘진심’이 읽혔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80점은 수업 시간에 딴짓 안 하면 그야말로 ‘대충은’ 나오는 점수이다. 더 높은 점수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시험 앞이라고 숙제도 없어서 아이는 더 잘 놀았다.

기가 막혔던 건 시험 뒤다. “나 시험 끝났으니까 마크(마인크래프트 게임) 동영상 실컷 봐도 되지?” “네가 시험이라고 뭘 했는데?” 실소가 나왔다. 아이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긴장”이라고 답했다. 그, 그래, 그랬구나.

시험이 벼슬이다. ‘80점만 받으면 되는’ 내 아이가 시험 끝났다며 유세 떠는 걸 보니 100점을 받거나 100점을 받고 싶은 아이들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학년 초 아이 학교에서 학부모 의견조사를 했다. ‘①상시평가 ②상시평가 기말고사 ③기말고사’ 중 나는 ①번을 선호했으나 ③번을 고른 이들이 많았다. 평소 아이들의 과도한 학습 노동을 딱하게 여기는 학부모들도 기말고사 정도는 봐야 실력을 알 수 있다고 여겼다. 나는 상시평가를 교사 재량의 ‘예고 없는’ 시험으로 이해했는데 다르게 이해하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정을 알면 잦은 시험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일정을 몰라도 각 과목, 각 단원을 마칠 때마다 신경 쓰인다는 것이다. 일부 학부모들은 ‘준비를 할 수가 없다(그리하여 내 아이가 낮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시사IN 김보경 그림

마땅히 붐빌 만한 요일·시간에 미용실도 마트도 상가도 텅 비어 있다면? 중학교 시험기간이라고 보면 된다. 시험을 앞둔 아이는 갑이 된다. 학부모는? 을이다. 그럼 이웃은? 병이다. 특히 수험생 있는 집은 방문은커녕 전화벨도 울려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의도하지 않은 ‘갑질’도 한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된 아이가 방과 후 교문 앞에서 만난 엄마에게 책가방을 내던지며 “엄마가 싸준 물이 뜨거워서 시험 망쳤잖아!”라고 소리 지르는 것을 봤다. 그 엄마는 아이의 되바라진 태도를 꾸짖기에 앞서 “몇 개나 틀렸는데?”라고 물었다. 내 아이가 1학년일 때 “엄마는 나 올백 맞으면 뭐 해줄 거야?”라고 불쑥 물어서 당황했던 적이 있다(자기 성적을 객관화하지 못하던 해맑던 시절이었음). 친구들 집에서는 뭐 뭐 해준다고 했다며 부러워했다. 그런 ‘거래’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아이 눈높이에서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누가누가 더 ‘빡세게’ 외웠나?

저절로 공부 잘하는 아이는 없다. 저절로 점수 잘 받는 아이도 없다. 드물게 그래 보이는 아이일지라도 내막을 살피면 학부모가 지능적으로 ‘관리’한 경우가 많다. 어릴 때부터 높은 점수 받아본 아이가 자존감도 높고 나중에 무슨 일을 하건 성취에 대한 감각도 좋다는 이유로 앞장서 ‘달리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기대한 점수를 못 받거나 못 이루면? 일찍이 높은 점수 받아본 아이일수록 양육자가 ‘포기’를 몰라 한층 더 버라이어티한 성장기를 보내기도 한다. 내 아이가 성적을 깔아줄 수도 있다는, 확률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결과를 간과하는지 모르겠다.

마음 편히 빈둥댈 아이까지 덩달아 긴장하게 만드는 게 시험이다. 그나마 초등 교실은 담임의 스타일에 따라 시험 전후 분위기가 좌우된다. 중학교에 가면 걷잡을 수 없다. 시험 전에는 긴장과 강박에 짓눌리고 시험 후에는 터무니없는 해방감에 ‘오버’하는 사태가 속출한다. 반복되는 조울 상태가 또래 문화처럼 되는 것이다. 날짜며 범위가 ‘예고된’ 이런 유의 시험은 아이들을 ‘잡는’ 강도에 견줘 정작 학력 측정이나 신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비극이다. 누가누가 더 ‘빡세게’ 외웠나 확인할 뿐이다. 예고 없는 시험이 진짜 평가이고 학습지도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80점만 받으면 된다던 내 아이는 결국 80점도 받지 못했다. 무엇을 생각하건 그 이하(의 점수)일 거라고 여기면 아이는 늘 예쁘다. 흑.

기자명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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