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은 끝났지만 트럼프의 ‘막장 드라마’는 계속되고 있다. 11월8일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러시아가 이번 대선에 개입했다’고 발표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공개적으로 모욕했다.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한 의회에도 막말을 퍼부었다. 이런 와중에 트럼프가 러시아를 감싸는 기색까지 보이면서 ‘트럼프-러시아’ 커넥션이 새삼스럽게 재조명되고 있다.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이 최초로 터진 것은 지난 7월이다. 7월 하순,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전당대회를 주관하는 당내 조직) 지도부 인사 7명이 주고받은 이메일 약 2만 건이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를 통해 전격 드러났다. 대선 후보를 뽑는 민주당 전당대회 직전이었다. 당시 나온 이메일 가운데는, 민주당 지도급 인사들이 버니 샌더스와 각축을 벌이던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밀기 위해 경선 과정에서 편파적으로 행동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데비 슐츠 전당대회 의장이 해임되는 등 민주당이 엄청난 내홍에 휩싸였다.

ⓒAP Photo민주당 지도부의 이메일 해킹 사건은 힐러리 클린턴 후보(오른쪽)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오바마, ‘러시아 대선 개입 밝히라’ 지시

그런데 이 폭로 배후에 러시아 해커들이 있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당시 클린턴은 해킹의 장본인으로 러시아 정보기관을 지목했지만 러시아는 공식 부인했다. 러시아가 클린턴을 겨냥한 이유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1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를 사주한 주범으로 당시 미국 국무장관인 클린턴을 지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설은, 지난 11월 초 대선이 트럼프의 승리로 종료되면서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CIA가 최근 일부 연방 상원의원을 만나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개입했다’는 최종 결론을 통보하고, 그 내용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반전을 맞이했다. 11월9일 관련 사실을 단독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CIA는 광범위한 정보 수집과 분석을 통해 문제의 민주당 전국위 이메일 해킹의 주범을 ‘러시아 정보기관과 연계한 복수의 개인’으로 특정했다. 이들이 해킹을 통해 입수한 이메일을 위키리크스에 제공했다는 것이다. 특히 CIA는 이 같은 해킹이 미국의 민주적 선거 과정에 대한 단순한 개입 차원을 넘어 공화당 트럼프 후보의 승리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러시아 정부가 펼친 광범위한 공작의 일환이라는 결론도 함께 내렸다. CIA 브리핑에 참석한 한 고위 정보관리는 “러시아 정부의 목표는 특정 후보, 즉 트럼프를 당선시키는 것이었다. CIA의 일치된 견해다”라고 〈워싱턴 포스트〉에 밝혔다.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에 대해 민주당 클린턴 측은 즉각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이에 트럼프는 “관련 내용을 전혀 믿지 않는다.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라고 격렬한 분노를 드러내며 CIA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는 “과거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고 말한 장본인이 바로 이 사람들(CIA)이다”라며 CIA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2003년 3월 당시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라크를 초토화시킨 뒤에도 무기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당시 침공의 밑바탕이 된 정보 보고서를 작성한 주체가 바로 CIA였다.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트럼프의 우군인 공화당까지 의회 차원의 강력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상원에서는 존 버 공화당 의원이 이끄는 정보위원회가 러시아의 사이버 공격에 대해 진상조사를 벌일 태세다. 존 매케인 의원의 군사위원회도 이 문제를 전담할 특별 소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방침이다. 이처럼 의회까지 진상조사를 벼르면서 트럼프는 우군인 공화당과도 대통령 취임 초기부터 갈등이 불가피해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자신이 퇴임하는 내년 1월20일 이전에 ‘러시아의 대선 개입’에 관한 조사 결과를 내놓으라고 국가정보국(DNI)에 명해둔 상태다.

ⓒTASS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국무장관으로 지명한 렉스 틸러슨 엑슨모빌 회장(오른쪽)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의 친구다.
이번 CIA 발표로 트럼프 재임 기간 내내 미국 행정부와 CIA 등 정보기관 간의 갈등과 마찰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CIA 작전국 부국장을 지낸 폴 필러는 〈워싱턴 포스트〉에 “트럼프는 복수를 좋아한다”라고 지적했다. 차기 행정부는 북한 핵 문제, 러시아의 대외(시리아·우크라이나) 군사 활동, 이란의 핵협정 준수 여부 등 주요 현안과 관련해서 정보기관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는 CIA의 이번 폭로 이전에도 정보기관들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정보기관이 제공하는 일일 비밀 브리핑에 대해서도 트럼프는 “필요할 때 받겠다. 향후 8년간 매일 똑같은 말로 된 똑같은 내용을 꼬박꼬박 보고받을 생각은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CIA를 싫어하는 것이 안보보좌관 지명자인 마이클 플린 예비역 중장의 입김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플린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 국장으로 일하다가 사실상 쫓겨난 인물이다. 재임 중 ‘해외 테러리스트에 대한 국방부의 비밀공작 활동’을 확대시키려고 했으나 CIA의 반대로 좌절했다고 한다. 플린은 지난해 10월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CIA가 (오바마 행정부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라고 맹공을 퍼붓기도 했다.

트럼프가 최근 렉스 틸러슨 엑슨모빌 회장(64)을 국무장관에 공식 지명한 것은 ‘트럼프-러시아 커넥션’의 결정판이다. 틸러슨은 푸틴의 친구이자 러시아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미국의 러시아 경제 제재에 강경한 반대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가 오랫동안 이끌어온 엑슨모빌은 러시아 석유 자원과 관련된 막대한 사업권을 갖고 있다. 이런 가운데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박사는 〈뉴스위크〉 최신호 칼럼에서 트럼프의 러시아 커넥션을 ‘반역적’이라고 질타하면서 “러시아의 대선 개입 사실을 즉각 일반에 공개하라”고 CIA에 촉구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보여준 기이한 행동들이 그의 러시아 커넥션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트럼프는 실제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친한 사이다. 사업적으로도 러시아와 관련성이 크다. 트럼프의 선거운동 책임자였던 폴 매너포트는 친러시아 인사로 꼽히며, 마이클 플린 안보보좌관 지명자 역시 지난해 러시아 정부의 홍보 방송사인 〈러시아 투데이〉 축하행사에서 푸틴 옆에 앉아 주목을 받았다. 대선 유세 당시 트럼프는 오바마보다 푸틴을 더욱 강력한 지도자로 추켜세워 빈축을 샀다. 러시아의 크리미아 합병을 묵인하는가 하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냉전 시절 소련에 대항한 서유럽 국가들의 집단방위 기구)에 대한 지원 중단 가능성을 언급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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