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주인공 신지는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희망 따위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고 지른 비명이었다. 많은 젊은이가 이 비명에 공명했다. 누구도 이들에게 차마 말을 걸지 못할 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원령공주〉를 통해 답신을 보냈다. “살아라, 너는 아름다우니까.”

2016년 우리 사회의 청춘들은 “세상이 망해버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흙수저로 태어나 헬조선을 견디다 못한 이들이 쏟아내는 절규다. ‘노오력’은 허망하고 세상은 요지부동이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20여 년 전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최근 저작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를 통해서다.

교육 현장에서 만난 보통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단속사회〉 등을 펴낸 사회학자 엄기호 씨가 이번 책에서 주목한 키워드는 제목 그대로 ‘리셋(reset)이다. ‘싸그리 갈아엎고 싶다’는 욕망이 우리 시대의 심연에 꿈틀대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리셋은 혁명의 전조라기보다는 계통 없는 ‘과격화’에 가깝다.

이번 촛불집회에도 리셋에 대한 욕망은 깔려 있다. 물론 리셋 너머로 나아가려는 희망도 존재한다. 현실정치도 리셋과 희망 사이에서 소용돌이친다. 그는 한 호흡 멈추고 시선을 돌리자고 제안한다. “광장의 조증과 일상의 울증 사이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긴 시간감각으로 역사를 마주하자”라는 것이다. 이번 겨울 그는 촛불의 한복판에서 촛불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시사IN 윤무영
왜 리셋이란 단어에 주목했나?

그동안 청년을 표현하는 키워드는 ‘무기력’이었다. 교육자나 정책 입안자들은 이 무기력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나는 이 문제 설정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여러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무기력 뒤에 깔린 것이 적개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리 ‘노오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적개심이 세상을 리셋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건 혁명으로서의 급진화와는 다르다. 과격화다.

적개심의 실체가 뭔가?

우리 사회가 구제불능이라는 인식이다. 좌파도 우파도 내 편이 아니다. 우파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면 좌파는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싸그리 치워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 대해 처음엔 내 주변에서도 과장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헬조선 신드롬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더라.

과거에도 혁명이 아니라 ‘전복’을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와 무엇이 다른가?

과거엔 조상, 즉 계보가 있었다. 마르크스든 트로츠키든 어떤 조상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게 없다. 그들은 스스로 ‘고아’라는 표현을 쓴다. 역사의 미아라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역사를 망각하면서 시대의 첫 아이들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리셋의 언어는 있지만 구축의 언어가 없다.

ⓒ연합뉴스청년전략스페이스 대학생 기획단이 ‘청년, 살려야 한다’라는 주제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왜 그런 적개심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몇 해 전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것이 잘못된 문제 제기라고 봤다. 청년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분노하면 행동할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분노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으면 그저 쌓아둔다. 이게 결국 헬조선으로 터졌다. 어쩌면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쌓여왔는지도 모른다.

리셋은 결국 어디로 향하게 될까?

여기엔 원한이 깔려 있다.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Ressentiment:강자에 대한 약자의 원한)’ 같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복수를 부른다. 각자 자기 삶을 이 꼴로 만든 원흉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복수의 정념이 무서운 것은 복수를 위해 내가 파괴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정치적 영역에서든 사회적 영역에서든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꽤 있다.

ⓒ시사IN 이명익‘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서는 서로를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동료로 여기기 시작했다.
리셋을 바라는 게 젊은이만은 아닐 텐데.

노인의 복수심도 상상 이상이다. 한국의 노인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486’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이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 생각이 맞다. 정치·문화적으로 우리는 계속 노인을 소외시켜왔다. 사례는 수두룩하다. 그 결과 지난 대선에서 그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복수한 거다.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하면 해소가 될까?

안 된다. 그럼 어떻게 될까. 사회학자 이종영씨가 말한 ‘혁명의 흉내’를 내게 된다. 혁명이 실패한 후에도 그것이 계속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마오쩌둥 시절의 문화대혁명이 그랬다. 우리가 소망하는 건 제도와 체제를 바꿔서 우리의 일상을 존엄하게 하는 건데 거꾸로 우리 일상을 전부 광장으로 옮겨버린다. 그러곤 하루 종일 앉아서 정치만 한다. 인터넷에서 논쟁하고 댓글 달고…. 이게 혁명의 흉내다. 문화대혁명이 사실 마오쩌둥의 권력을 지켜주었듯 이런 혁명의 흉내를 통해서 권력을 공고화하는 세력이 따로 있다.

촛불집회에도 그런 징후가 있나?

촛불이 기로에 서 있다. 지금 우리가 촛불집회에서 뭘 경험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200만이라는 숫자를 강조한다. 대중을 점으로 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을 동료 시민이 아니라 동원의 대상으로 여긴다. 이를 통해 누군가를 처단하는 선에서 멈추려 한다. 여기에서 머물고 말 것인가. 내가 이번 촛불집회에서 주목한 건 이런 거다. 집회 내용을 수화로 통역하고 차별과 혐오가 없는 집회를 열자고 주장했다. 우리가 서로를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동료 시민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중대한 변화다.

확실히 이번 촛불집회는 과거와 좀 다른 것 같다.

촛불집회 이전에 우리는 세월호를 말하지 못했다. 세월호 리본을 달고 있으면 언젯적 세월호냐며 시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사라졌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운명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나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번 집회에 나가는 보통 사람들을 보면서 많이 놀란다. 이들은 최순실이 싫어서 집회에 나가는 게 아니다. 이 사회가 지긋지긋한 것이다. 이번이 아니면 우리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는 절실함이 있다. 집회 시작부터 끝까지 간절하게 촛불을 들고 서 있는 이들을 보면 다 보통 사람들이다. 이들이 새로운 결사체가 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왕의 머리를 잘라버리고 모든 정치적 부재의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했는데, 사회가 혼란해지는 것 아닐까?

집회 끝나고 청소하는 것 봐라. 일부에서는 치안에 순응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데 자세히 보면 청소를 지나치게 열심히 하지 않나. 이건 하나의 퍼포먼스다. 우리에게 자치 능력이 있다는 시위를 하는 것이다.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나라에서 왕의 목을 친다고 나라가 혼란해질까. 1980년 5월 광주를 보라. 그 시국에서도 도둑 한 명 나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지금 한국은 공화국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도 서 있다. 공화국이란 사실 ‘우리 모두가 왕의 살인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촛불 이후’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광장의 조증과 일상의 울증을 반복하고 있다. 이 간격이 커질수록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 대중의 인기를 끌게 된다. 그들은 검투사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대중을 흥분시킨다.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정치인이 나타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유족과 백남기 농민 유족들이 아직 사람이 패배하지 않았음을 가르쳐주었다고 썼다.

한국 사회는 우리가 서로를 불신하고 이간질하게끔 만들었다. 그동안 국가에 맞서 죽은 이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은 미치거나 범법자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유족과 백남기 농민의 유족은 정신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미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권력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국가권력에 맞서) 인간이 패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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