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사법부를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2월15일 박근혜 게이트 관련 국회 국정조사 4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은 양승태 대법원장과 최성준 당시 춘천지방법원장(현 방송통신위원장)의 ‘사찰 의혹 문건’을 폭로했다. 조 전 사장은 문건을 직접 김성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에게 제출했다. 여야 의원들은 이 문건이 국정원에서 생산돼 청와대로 보고됐다고 주장했다. 조 전 사장은 청문회장에서 “삼권분립이 붕괴되고 헌정질서가 유린된 명백한 국헌 문란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12월15일 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왼쪽)이 국정조사 특위 제4차 청문회에서 김성태 위원장에게 양승태 대법원장·최성준 전 춘천지방법원장 사찰 의혹 문건을 증거자료로 제출하고 있다.


조 전 사장이 공개한 문서의 위쪽 중앙에는 각각 ‘대외비, 2014.2.7. 파기’ ‘대외비, 2014. 2.10. 파기’라고 적혀 있고, 양쪽 귀퉁이에 ‘차’라는 반투명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문서 정중앙에도 마찬가지로 ‘차’라고 새겨져 있다(오른쪽 위 사진). 문건에는 양승태 대법원장과 최성준 당시 춘천지방법원장의 행적과 평판을 기록했다. ‘언론이 등산 마니아인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 후 매주 금요일 오후 일과시간 중 등산을 떠난다는 비판 보도를 준비하자, 대법원이 이를 해명했다’는 내용이다. 또 ‘최성준 춘천지법원장은 법조계에서 부임 후 관용차 사적 사용 등 부적절한 처신에다 (중략) 소설가 이외수 등 지역 내 유명 인사들과 친분을 구축해놓고 법조계 인사와 면담 주선 등 환심 사기에 적극 이용 중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라는 내용이다.

국민의당 이용주 의원은 청문회에서 “김영한 전 민정수석 유품 중 국정원이 청와대에 제출한 문서가 있다. 원본에는 아무 표시가 없는데 복사하면 워터마크(문서 중앙의 ‘다’라는 반투명한 표시)가 나타난다. 2011년 국정원이 청와대 정무수석실에 보고한 문건 사본에도 워터마크(가)가 찍혀 나온다. 조한규 사장이 갖고 있던 문건은 국정원이 작성한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국정원이 생산한 문건 가운데 외부에 보고하는 사본이 있을 때는 ‘가’ ‘나’ ‘다’ ‘라’처럼 받는 사람의 문서마다 다른 워터마크가 새겨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 전 〈세계일보〉 사장은 〈시사IN〉과 인터뷰에서 “2014년 정윤회 관련 문건을 뭉텅이로 입수했을 때 함께 있던 문서다. 후속 보도를 위해 당시 취재팀장에게 ‘정윤회 문건보다 더 센 거 없냐’고 했더니 미공개 문건 8개 중 (사찰 문건 2개) 그걸 가져왔다. 굉장히 중요한 문서라고 생각해 복사해놓았다”라고 말했다. 〈세계일보〉는 조 전 사장의 폭로 다음 날 12월16일자 사설을 통해 “문제의 문서는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라고 밝혔다.

 

 

 

ⓒ연합뉴스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이 공개한 국정원의 양승태 대법원장, 최성준 전 춘천지방법원장에 대한 사찰 의혹 문건.

 


해당 문건이 실제로 국정원이 작성한 것이라면, 정보기관의 사법부 사찰 논란으로 파문이 커지리라 예상된다. 국내 정치 개입을 금지한 국정원법도 위반한 셈이다. 대법원도 폭로 당일 즉각 “사찰이 사실이라면 헌법정신과 사법부 독립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라고 공식 견해를 밝혔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이 민간인 등을 사찰한 정황은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일지를 보면,  2014년 8월7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長)’ 표시와 함께 ‘우병우팀, 허수아비 그림(광주), 애국단체 명예훼손 고발. 박 신부 뒷조사. 검찰, 국정원팀 구성→6국 국장급. 케이스바이케이스로 할 것이 아니라 ex 산케이 보고 잊으면 안 된다. list 만들어 응징해줘야. 추적하여 처단토록, 정보수집 경찰-국정원을 팀 구성토록’이라고 쓰여 있다(위 사진).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표현한 ‘세월오월’ 그림을 그린 홍성담 작가와 18대 대선을 부정선거라고 주장한 ‘박창신 신부’를 국정원을 동원해 뒷조사한 정황이다.

추 국장이 우병우와 안봉근에 비선 보고 의혹

김 전 수석의 업무일지를 보면 국정원과 청와대의 커넥션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특히 국정원 추 아무개 국장의 역할이 주목된다.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2014년 8월7일 업무일지에 ‘국정원팀’을 ‘6국 국장급’이 맡는다고 적었다. 2014년 9월23일자 김 전 수석의 업무일지에도 추 국장의 이름이 등장한다. ‘추:국정원 6국장→8국장(수집)’이라는 내용이다. 6국장에서 8국장으로 이동한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추 국장은 원세훈 원장 시절이던 2011년 6월 국정원이 생산한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박원순 제압 문건’의 작성자다. 국정원은 2013년 5월 박원순 문건이 폭로되고 검찰 조사가 시작되자 문건 작성 책임자인 추씨를 자택 대기발령 조치했다. 당시 추씨는 박근혜 정부 인수위원회를 거쳐 청와대 민정수석실 선임 행정관으로 파견 나가 있었다. 추씨는 약 5개월 동안 서울 송파구에 있는 아파트 자택에 대기발령으로 칩거했다. 그 뒤 2014년 이병기 신임 원장이 취임하며 2급이던 추씨는 1급으로 승진했고 이후 국내정보수집국장으로 영전했다. 그가 맡은 국내정보수집국장은 정부 각 부처 및 언론·법조·시민사회단체를 담당하는 국정원 국내정보 파트 IO(정보관)들을 총괄하는 자리였다(〈시사IN〉 제464호 ‘전 국정원 직원들의 양심선언, 박원순 공작’ 기사 참조).

 

 

 

 

아래는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일지.

 


박근혜 게이트 이후 추 국장은 최순실씨와 관련된 정보를 우병우 전 민정수석, 안봉근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에게 비선 보고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국정원은 이에 대한 감찰을 진행했고, 추 국장은 현재 퇴직명령 대기 상태다. 그는 12월22일 5차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된 상태다.

박영수 특검은 이번 국정원 대법원 사찰 의혹에 관해 “청문회에서 특검 고발 계획이 나온 것으로 안다. 고발 이후 과연 특검에서 처리할 사안인지 검토해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12월16일 ‘국정원이 이 문건을 생산했느냐’는 〈시사IN〉의 질문에 국정원은 “확인 중에 있다”라고 밝혔다.

 

기자명 신한슬 기자 다른기사 보기 hs5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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