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 봤니? 멜 깁슨이라는 배우가 주연에 감독에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영화인데 스코틀랜드의 독립 영웅 윌리엄 월리스가 잉글랜드에 맞서 투쟁했던 역사를 얼개로 하고 있어. 당시 스코틀랜드는 왕가의 혈통이 끊기고 귀족들이 분열한 가운데 남쪽에서 침략해온 잉글랜드의 지배에 신음하고 있었거든.

참고로 말해두면 이 영화는 영화적 상상력으로도 용서하기 어려운 과장과 왜곡을 함유하고 있어. 이를테면 영국의 잔인한 침략자 에드워드 1세의 며느리인 프랑스 공주가 바보 같은 남편 대신 용맹하고 신사적인 윌리엄 월리스에게 매혹되어 그 아이를 가졌다는 식이지. 실제 인물인 프랑스 공주 이자벨라가 에드워드 1세의 며느리가 된 것은 맞지만 그녀가 도버 해협을 건너온 건 윌리엄 월리스가 체포돼 처형당한 때로부터 4년 뒤란 말이다.

어쨌건 그 영화 속 인물 중 하나를 주목해보자. 이 프랑스 공주 이자벨라의 남편. 스코틀랜드 처지에서 보면 폭군이지만 잉글랜드 처지에서 보면 위엄 있는 정복 군주였던 에드워드 1세의 후계자. 영화 속에서 천하의 지질이로 나오는 그는 실제로도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이었지. 에드워드 1세도 자신의 이름을 딴 후계자 에드워드 2세를 몹시 못마땅해했다고 해. 특히 아들 주위를 둘러싼 간신들을 경계했는데 에드워드 2세가 가장 죽고 못 살던 총신, 그래서 “둘이 동성 연인 아닌가?” 하는 수군거림까지 나올 정도였던 프랑스인 피에르 가베스통이 대표적인 존재였지. 에드워드 1세는 그를 추방하지만 에드워드 2세가 즉위하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콘월 백작’으로 벼락출세를 하게 돼. 요즘 유행하는 한국말로 ‘비선 실세’인 셈이야.

ⓒwikipedia에드워드 2세는 권한과 책임이 없는 이들을 총애하다가 국정 운영에 혼란을 일으키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에드워드 2세의 가베스통 총애가 어느 정도였냐면 말이야. 이자벨라가 시집왔을 때 결혼 축하 파티에서 왕의 옆자리를 차지한 것은 가베스통이었고 카펫에 새겨진 문장(紋章)도 이자벨라의 문장이 아니라 가베스통 가문의 것이었으며, 당시 유럽 최고의 부국 프랑스 왕이 사위에게 준 선물들이 몽땅 가베스통에게로 갔다고 해. 아버지를 닮아 키도 크고 용맹하기도 했다는 에드워드 2세였지만 가베스통 앞에서는 바보가 돼버렸다는구나. 꼭 몇백 년 뒤 최 아무개씨 앞에 선 어느 나라 대통령처럼 말이다.

이 가베스통은 영국 귀족들의 응징을 받고 비참하게 죽지만 에드워드 2세는 기어코 이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고 여러 주요 귀족들이 목숨을 잃어. 이자벨라는 그래도 남편을 편들었지만 에드워드 2세가 또다시 ‘비선 실세’를 마련하게 되면서 독한 마음을 먹지. 이번 비선 실세는 휴 데스펜서라는 자였는데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자벨라와 그녀 아들의 영역을 건드리면서 이자벨라의 증오를 산 거야. 이자벨라는 친정 프랑스의 군대를 이끌고 에드워드 2세라면 진저리를 치는 영국 귀족들과 합세해 에드워드 2세를 공격하게 돼. 휴 데스펜서는 토막이 나 죽었고 에드워드 2세는 자신의 아들이자 이자벨라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감금됐다가 죽임을 당해. 결국 에드워드 2세는 중세 잉글랜드 최고의 왕으로 꼽히는 아버지로부터 왕위와 외모는 물려받았으되 냉철함과 정치력은 전혀 이어받지 못했던 거야. 그래서 “과거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박근혜 대통령 1차 담화에서 인용)”과 비슷하게 어려서부터 친구였던 가베스통이나 이번에 구속된 ‘문화계의 황태자’ 차은택처럼 탐욕스러웠던 휴 데스펜서 같은 자에게 놀아나다가 스스로를 그르치고 말았지.

이번엔 지구 반대편으로 가볼까. 남아메리카 지도를 보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우루과이가 있고 그 내륙 쪽으로 파라과이가 있어. 이 나라는 남미에서 가장 빨리 독립한 나라 중의 하나야. 브라질·칠레·페루보다 앞선 1811년에 나라를 세우게 되니까.

파라과이는 남미에서 가장 안정된 부국이라 불릴 만큼 빠르게 발전했어. 특히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대통령은 독재자이기는 했지만 강력한 보호무역과 관세정책으로 파라과이 산업을 보호하여 이 나라를 탄탄한 발전 도상에 올려놓았단다. 그 후계자는 아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남미 최강대국을 꿈꾸던 그에게 바다 없는 내륙국 파라과이는 매우 불편한 현실이었지. “바다로 가자!”

바다로 통하는 길목이던 우루과이에서 브라질의 내정간섭에 불만을 품은 반(反)브라질 세력이 봉기하자 파라과이는 여기에 개입해 브라질과 전쟁을 시작하게 돼. 그 와중에 아르헨티나 국경을 침범하면서 아르헨티나와도 충돌하게 되지. 여기에 친(親)브라질 세력이 정권을 잡은 우루과이까지 가세하니 파라과이는 1대3의 악전고투를 맞게 돼(이 전쟁은 ‘삼국동맹 전쟁’이라고 불린다). 파라과이군은 초반에는 용감하게 싸워 우세를 점하지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어디 보통 큰 나라냐? 이들이 마음먹고 전쟁에 나서자 파라과이는 이내 국력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어. 그러나 로페스는 포기하지 않았고 항복이나 강화를 주장하는 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해. 파라과이군은 죽으나 사나 싸울 수밖에 없었어. 국가 총력전을 넘어 국가 ‘전멸전’에 가까운 전쟁이 이어졌고 파라과이 남자의 무려 90%가 목숨을 잃는 어이없는 사태가 빚어지고 말아.

ⓒwikipedia남미 3국과 전쟁을 벌여 파라과이를 파멸로 이끈 독재자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뒤집어버리기도

파라과이의 비극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은 1869년 8월16일 벌어진 아코스타 뉴 전투였어. 여섯 살배기 어린이를 포함한 소년들 3500명은 이미 죽고 없는 남자 어른들을 대신하여 2만명에 달했다는 브라질 기병대와 맞서 싸운단다.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 수염까지 붙이고 총 모양의 막대기를 휘둘렀던 그들은 6시간의 전투 끝에 전멸당하고 말았지. 아이러니하게도 이 슬픈 날은 오늘날 파라과이의 어린이날로 기념되고 있어. 아이들이 비참하게 죽어간 몇 달 뒤 로페스도 마지막 파라과이 군대와 함께 죽음을 맞지. 그는 항복을 권유받지만 “국가와 함께 죽겠다”라며 고집을 부렸다고 해.

그가 파라과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애국심’ 때문에 파라과이를 지옥으로 이끌었던 셈이야. 로페스가 고집을 꺾고 패배를 인정했다면, 그 스스로 치욕을 감당했다면 파라과이의 비극의 크기는 훨씬 줄어들었을 거야. 그러나 로페스는 “항복하려는 자들을 죽여라”며 버텼고 어린아이들이 수염을 붙이고 적군에게 맞서는 상황에서도 파라과이의 영광을 부르짖었다. 결론은 파국이었어. 이 전쟁 후 파라과이 인구는 3분의 1로 줄고 남녀 성비는 1대10 내지 1대20이라는 기록적인 수치에 이르게 돼. 지금도 그 상처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는구나.

봉건시대의 왕이건, 공화국의 대통령이나 수상이건, 한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은 그만큼의 책임감과 자질을 지녀야 해. 그 권력과 지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휘둘리거나 자신만의 아집에 사로잡혀 자신의 방식으로 나라를 ‘사랑’한 통치자들은 에드워드 2세처럼 자신이 총애하던 이들을 망치고 스스로를 파멸시킬 뿐 아니라 프란시스코 로페스처럼 자기 국민들마저 파멸에 이르는 급류에 던져버리게 된단다.

맹자는 국민들과 통치자를 물 위에 뜬 배에 비유했어.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뒤집어버리기도 한다(水則載舟水則覆舟).” 아마도 전쟁에서 죽어간 파라과이 국민들은 진작 로페스를 뒤집어버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불현듯 궁금해지는구나. 우리는 어떤 물이며, 우리 위에 뜬 배는 어떠하며, 우리는 이 배를 띄워야 하는지 뒤집어야 하는지.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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