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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발은 미국으로 젖은 발은 쿠바로

냉전이 붕괴되자 ‘중남미의 외톨이’ 쿠바에 위기가 왔다. 소련과 동유럽에서 들여오던 생필품과 석유가 급감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특별시기’로 선포하고 대처했지만 미국으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쿠바 현대사에 드리운 피델 카스트로의 삶을 지난 호에 이어 재조명한다.

박정훈 (중남미 연구자)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2월 22일 목요일 제4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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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붕괴는 외톨이 쿠바에 고독만 안겨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한 고통은 바로 배고픔이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쿠바는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았다. 쿠바는 혁명 이후에도 사탕수수와 담배를 수출하는 국가였다. 혁명 이전에는 주로 미국에서 오던 수입품이 혁명 이후에는 소련과 동유럽에서 왔다. 식량과 의약품은 물론이고 생필품과 석유는 모두 공산국가들에서 들여왔다. 소련은 사탕수수를 매우 후한 가격으로 사주었고, 석유는 매우 싸게 공급해주었다. 그렇게 쿠바를 배려하던 사회주의 형제 국가가 1991년에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쿠바 정부는 1992년에 이른바 ‘특별시기(Periodo Especial)’를 선포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소련 몰락 이후를 가리켜 “혁명 이래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라 쿠바 역사상 가장 힘든 시기”라고 말한 바 있다. 20세기 중남미 역사에서 이렇게 힘든 상황에 놓인 나라는 없었다. 대공황기의 어느 중남미 국가보다도 1990년대 초반의 쿠바가 더 힘들었다.

1989년과 1993년 사이에 쿠바 국내총생산은 무려 45%가량 축소된다. 1989년과 1992년 사이에 석유 수입량이 86% 줄었고, 식량 수입량도 42% 감소했다.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 물자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버스는 휘발유가 부족하거나 동유럽에서 수입하던 부품이 없어 무용지물이 되었다. 트랙터는 소가 끌게 되었고, 말이 끄는 달구지가 다시 등장했으며, 사람들은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야 했다. 에너지 위기에 투자마저 줄어들어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정전은 하루 12시간씩 계속되었다.

ⓒAP Photo
1994년 쿠바와 미국 사이의 바다에서 발견된 쿠바 망명자들. 고무 튜브와 드럼통 등으로 얼기설기 만든 뗏목에 타고 있다.
이제 하루에 두 끼를 먹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다. 쇠고기·닭고기·생선은 식사 메뉴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식용유 대신 맹물로 달걀을 프라이하는 법, 자몽과 오렌지 그리고 바나나 껍질을 이용해 고기 맛을 내는 법 등을 개발했다. 영양부족으로 각기병, 시신경염 등을 앓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나마 식량배급 제도로 대규모 기아와 영양 결핍 사태를 겨우 막았다. 당시 쿠바 정부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옵션 제로’라는 대책까지 준비해두었다.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군대가 직접 동네마다 돌면서 끼니를 배급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갑자기 쓰러지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었다.

살아서도 고달팠지만 죽어서도 편히 쉴 수 없었다. 당시 쿠바인들은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가톨릭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려면 나무로 관을 만들고 매장해야 하는데, 목재조차 구하기가 힘들었다.

쿠바 화폐인 페소의 가치는 폭락했고, 물가는 치솟았다. 한 공식 자료에 따르면 1992년 쿠바 인구의 약 65%가 월 소득이 2달러 미만에 불과했다. 당시 환율은 곤두박질쳐서 1달러에 150페소였다. 쌀 1파운드(453g), 아보카도 1개가 140페소에 달하던 시절이었으니 한 달치 월급으로 아보카도 2개를 사면 그만이었다.

ⓒAP Photo
2008년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오른쪽)가 국가평의회 의장에 올랐다.
피델 카스트로가 소요 현장에 나타나 대화


그 시절 쿠바 혁명의 적대자들은 물론이고 우호적으로 지켜보던 사람들도 쿠바 혁명 체제가 몰락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모두 쿠바가 소련과 동유럽의 길을 갈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쿠바 내부에서도 그런 조짐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1994년 8월5일에는 수도 아바나에서 혁명 이후 최초의 대중 소요가 발생했다. 그날 아침 아바나 사람들 사이로 두 가지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하나는 사람들이 연안 여객선(Lanchita de Regla)을 납치해 플로리다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배들이 도착해서 떠나고 싶은 사람들을 실어갈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송출하는 보수적인 라디오 마르티가 직접 언급했다는 것이다.

‘특별시기’에 힘겨운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쿠바에서 바닷길로 144㎞ 떨어진 플로리다로 가면 망명 쿠바인들의 공동체가 있어서 먹고살거나, 성공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배를 훔쳐서라도 쿠바를 떠나고 싶어 했다. 그런 사람들을 술렁이게 한 소문이 퍼진 것이다. 사람들은 아바나 방파제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정오가 지나도 기다리던 배들이 오지 않자 사람들의 기대감은 절망감으로 바뀌었다. 군중이 모여든 것에 위기감을 느낀 경찰이 해산을 시도하자 절망감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경찰을 피해 달아난 아바나 시민들이 방파제 앞 대로로 흩어지더니 사이사이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골목에서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다시 방파제 쪽으로 나아갔다. 누군가가 “물러가라!(Que se vaya!)” “피델 꺼져라!(Abajo Fidel!)”를 외쳤다. 플로리다로 탈출하려던 사람들이 시위대로 변한 것이다.

분노한 시민들이 돌과 막대기를 들었다. 경찰차 유리창이 돌에 맞아 깨졌고, 호텔과 상점의 쇼윈도가 박살났다. 약탈이 벌어지고, 쓰레기통이 뒤집혔다. 소요는 순식간에 아바나의 서민 지역으로 퍼져갔다. 열대의 나라 쿠바는 8월의 열기에 대중시위 열기마저 더해졌다. 마치 화약고에 불똥이 튄 것과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불과 한 달 전인 7월13일에는 예인선이 침몰해 30여 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아바나를 떠나려던 사람들이 예인선을 납치해 플로리다로 가다가 이를 쫓아온 다른 예인선들의 공격을 받아 쿠바 연안에서 7마일 되는 지점에서 침몰했다. 정부는 불법행위를 막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고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배도 고픈데 떠나려는 사람마저 죽인다고 생각했다.

대중 소요는 오후에 진정되었다. 놀랍게도 직접 피델 카스트로가 소요 현장에 나타났다. 그는 지프차를 타고 경호원 몇 명을 데리고 직접 등장했다. 군인이나 경찰을 대동하지도 않았다. 그는 현장의 기자들에게 “원하는 사람은 떠나도 좋다”라고 말했다. 쿠바 해안경비대가 이민 가려는 이들을 잡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소요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날 경찰은 수백명을 체포했다. 다행히 총격도 사망자도 없었다. 부상자들이 제법 되었지만 모두 가벼운 타박상에 그쳤다. 이날 시위는 1959년 혁명 이후에 최초로 쿠바에서 벌어진 대중 소요였다. 쿠바 정부도 이 소요를 댐의 균열로 인식했다. 이 틈이 더욱 커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발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소요 사태 이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8월11일에 쿠바를 떠나려는 사람들을 막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정부가 국경을 개방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플로리다로 가는 수단까지 제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정이 좋은 사람들은 그나마 엔진이 달린 배를 타고 승선 인원을 초과한 채로 달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뗏목을 만들어 띄웠다. 물에 뜨는 것이라면 모두 이용해서 얼기설기 만든 원시적인 뗏목이었다. 고무 혹은 드럼통으로 뗏목 바닥을 만들고, 나무와 철로 난간을 만들고, 이불 천과 나무로 돛을 달았다. 그리고 친구나 가족 예닐곱 명, 열댓 명 등이 한 조가 되어 노를 저어 갔다. 훗날 사람들은 이 이민 물결을 ‘뗏목 이주 위기’라고 불렀다. 모두가 무사히 플로리다 해안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도중에 익사했다. 그런데도 수천명이 쿠바를 떠났다.

결국 미국은 1994년 9월9일 이 대규모 이민 물결을 제지하기 위해 쿠바와 이민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은 매년 2만명의 쿠바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1966년 미국 의회가 채택한 이른바 쿠바 이민법(The Cuban Adjustment Act)을 개정했다. 기존 법은 쿠바 이민자에게 특혜를 주는 법이었다. 이 법은 쿠바 이민자들에게만 자동적으로 ‘정치 난민’으로 규정해 망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1년 뒤에는 영주권을 주었다. 개정 이민법은 기존 법을 개정해 “젖은 발, 마른 발(Wet feet, dry feet)” 원칙을 내세웠다. 즉 쿠바 이민자가 플로리다 해안에 도착하면(마른 발) 정식 이민자로 간주하여 영주권을 주지만, 양국의 공해상에서 발견되면(젖은 발) 쿠바로 돌려보낸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대규모 이민 위기는 일단 수습되었다.

미국이 경제 봉쇄했지만 위기 극복에 성공

쿠바 정부도 위기 극복에 나섰다. 당시 쿠바가 참고할 몇 가지 길은 있었다. 먼저 고르바초프가 펼친 개혁·개방 정책을 따르는 길이 있었다. 하지만 피델 카스트로는 고르바초프의 몰락과 소련의 급격한 붕괴가 너무 빠르고 과도한 개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다른 하나는 기존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중국의 길이었다. 쿠바는 100% 외국인 소유 기업도 허용하고, 해외 자본과의 합작기업 설립을 허용했다. 스페인이 호텔 사업에, 멕시코가 전화 사업에 투자하는 등 유럽과 아메리카 국가들이 적극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쿠바에서 시장경제가 성장하는 것을 미국이 가로막았다.

미국은 1966년부터 쿠바와 완전히 무역을 중단하고 쿠바를 경제적으로 봉쇄해왔다. 그런데 탈냉전기인 1990년대에 오히려 쿠바에 대한 봉쇄 조치를 더 강화했다. 1992년에는 제3세계 국가에 있는 미국 기업의 자회사들조차 쿠바와 무역하지 못하게 하더니, 1996년에는 쿠바 혁명정부가 국유화한 미국인 재산에서 이득을 얻는 외국 기업을 고소할 수 있게 만들었다. 미국인의 범위에는 혁명 이후 망명한 쿠바인들까지 포함했다. 이 법안은 1959년 이후 혁명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외국과의 무역을 방해하고, 외국인의 투자를 막으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미국이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유독 쿠바에 대해 이토록 초강경 조치를 취한 것은 쿠바 붕괴론 때문이었다. 쿠바 경제를 더욱 압박하면, 쿠바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와 대중봉기로 이어질 것이고, 그것이 카스트로 체제의 몰락으로 나아가리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미국의 압박에도 쿠바는 느릿느릿 중국의 길을 따랐다. 국영 농장을 개혁해 협동조합이 농업을 주도하게 만들었고, 생산량 일부를 시장에 팔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였다. 자영업을 허용해 세수도 늘렸다. 관광업 투자를 늘려서 관광객을 유치하자 최대 외화 수입원이 되었다. 의료 서비스는 주요 수출 품목이 되었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1999~2013)가 무상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바 의료인력 3만여 명을 수입했다. 또한 정부는 미국 거주 망명 쿠바인들의 달러 송금을 늘리기 위해 쿠바 국민들이 달러를 보유할 수 있게 했는데, 달러 유입으로 정부의 외환보유고도 늘어났다. 에너지 위기도 쿠바 연안에서 원유가 발견되고, 베네수엘라가 저렴하게 석유를 제공하면서 누그러졌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쿠바는 혁명의 성과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사회복지 투자 비율을 보면 1980년대 GDP 대비 17%에서 1993년 24%로 오히려 늘어났다. 쿠바가 지키기 위해 노력한 교육 수준과 의료 수준 등 사회주의적 인프라는 해외 투자자들에게 투자 유인으로 작용했다. 해외 투자기업은 교육비와 의료비, 노사관계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2008년에는 교육과 의료, 국민소득을 종합하는 인간개발지수에서 180개국 중 51위, 중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칠레·우루과이·코스타리카 다음으로 5위를 기록하며 혁명의 성취를 지키는 데도 성공했다.

정치체제도 개선했다. 무엇보다 입법부(민중권력의회)를 강화했다. 쿠바 국민들은 혁명 이후 처음으로 인민의원들을 직접 비밀투표로 선출하게 되었다. 직접 투표로 의원들의 평균연령이 43세로 낮아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지도자 교체도 이뤄졌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부터 2008년까지 쿠바의 최고지도자인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다. 2006년 80세 생일을 앞두고 위장출혈로 긴급 수술을 받으면서 사망설까지 퍼진 적이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의 동생이자 혁명 동지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라울은 형처럼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는 아니지만 신중하고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라울이 1959년 혁명 직후부터 2008년까지 쿠바 군대를 통솔해왔기 때문에 권력 교체 과정에서 동요는 전혀 없었다.

신임 국가평의회 의장 라울 카스트로는 2009년 1월1일 쿠바 동부 산티아고 시에서 열린 혁명 50주년 기념식에서 쿠바 민중의 피와 땀으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1994년 최초의 대중 소요가 벌어졌을 때 곧 몰락할 것만 같던 쿠바 혁명체제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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