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시해서 말하자면, 김광석이라는 가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서태지·신해철과 함께 1990년대의 표정을 우리에게 제시했던 그의 음악을 애청하거나 끼고 살았던 기억이 내게는 전무하다. 대신 김광석의 노래는 내 친구들을 통해 대학교의 학과 방과 술집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났을까. 어느새 김광석의 노래 거의 전부를 줄줄이 외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건, 조금은 기이한 느낌이었다. 아마 노래라는 것이 지닌 근원적인 힘 덕분이었을 테다.

세상을 떠난 김광석(위)이 목소리로 돌아왔다.
12월7일에 막 도착한 〈김광석, 다시〉를 듣는다. 이 글을 쓰기 전, 이 음반을 향한 비판조의 몇몇 글을 목격했다. 주된 논리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 첫째, 대기업의 상술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참여 가수들이 김광석과는 별 연이 없다는 것이다. 글쎄, 일견 고개를 끄덕였지만, 음악이라는 것의 ‘영향력’과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조금은 불공평한 시각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건, 결과물 그 자체일 테니까 말이다.

1번 곡 ‘너에게’를 듣고,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2번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다 감상했을 땐, 이 음반이 지향하는 기조를 충분히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이 앨범은 ‘김광석 음악의 확장판’이다.

이 음반에서 대부분의 가수들은 기존 원곡에서는 들을 수 없는 몰아치는 현악과 연주로 스케일을 극대화해 음악적인 감동을 전달하려 한다. 여기에 김광석의 목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다는 점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팝 쪽으로 말하자면 냇 킹 콜과 내털리 콜의 ‘언포게터블(Unforgettable)’을 앨범 전체로 구현한 케이스랄까. 확장이라는 개념은 여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김광석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놀랍다. 10년이 두 번이나 지났음에도, 그의 보컬은 현대적인 편곡과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섞여 듣는 이들에게 강한 집중력을 끌어낸다. 사망한 아버지와 살아 있는 딸의 화음을 통해 그래미까지 석권한 ‘언포게터블’이 나온 게 1991년이었다.

그사이 신해철·윤상·이승환 같은 가수들의 노력으로 국내 레코딩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했고, 세상을 노래했던 김광석과 세상을 노래하는 가수들의 이런 만남을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이뤄지게 했다. 이렇게 기술의 발전은 콘텐츠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 인생의 결 자체를 달라지게 한다. 스마트폰을 든 당신의 모습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라이브를 봤더라면

페이스북에 김광석을 그렇게 애정하진 않았다고 고백하자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그 댓글들은 거의 한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해줬다. “라이브를 네가 못 봐서 그래.” 그래서 더욱 아쉽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나는 그가 광화문의 광장에 섰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더 깊어진 목소리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노래했을 것이고, 셀 수도 없이 많은 관객들은 그를 향해 더 커다란 목소리로 화답했을 것이다. 양희은의 ‘상록수’에 버금가는 전율스러운 순간이 분명 거기에 머물러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지금 〈김광석, 다시〉가 굉장한 걸작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런 앨범에도 어떤 가치는 존재하고, 그걸 곱씹을 이유는 충분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상상해본다. ‘일어나’가 광장에서 그의 벼락같은 목소리를 통해 퍼져나갈 때의 감격을.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그의 노래를 대신해 앞으로도 불러줄 것이다. 노래는 계승되고, 삶은 이어진다. 모두에게 응원을. 파란 지붕 밑에서 의자에 앉아 머리하고 있을 한 사람만 빼고.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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