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거리를 털레털레, 여자는 걷고 있다. 언덕 위 외진 곳에 세워둔 차가 견인되는 바람에 벌써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내려오는 중이다. 그때다. 어디에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자기도 모르게 음악에 이끌린 여자가 어느새 레스토랑 안에 서 있다. 피아니스트를 보고 있다. 건반 위를 오가는 남자의 손, 피아노 쪽으로 살짝 숙인 그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이젠 남자 차례다. 꽉 막힌 도로에 서 있는 차. 짜증을 내며 경적을 울리는 남자. 그가 어떻게 이 레스토랑까지 오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저 피아노 앞에 앉았는지 영화가 보여준다. 무슨 연유로 지금, 이곳에서, 저런 얼굴로, 그러니까 마치 무슨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한 사람의 표정인 채로 자기 앞의 희고 검은 건반을 차례로 눌러대고 있는지 영화가 말해준다.


여자가 있는 쪽으로 남자가 걸어 나온다. 남자가 있는 쪽으로 여자가 걸어 들어간다. 툭. 둘의 어깨가 부딪친다. 하나의 인생이 다른 하나의 인생과 부딪친다. 행성 충돌로 다른 행성의 운명이 바뀌듯, 그렇게 두 개의 우주가 느닷없이 충돌하여 흔들리는 그 밤은 참으로 눈부셨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게 끝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희망의 시작이자 모든 실망의 끝이었지만, 또한 어떤 막연함의 시작이자 다른 가능성의 끝이기도 했던 만남. ‘꿈을 좇는 청춘’의 얼굴로 다가와, ‘청춘을 그리워하는 꿈’의 뒷모습으로 멀어지는 이야기.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도시 로스앤젤레스를 무대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꿈의 도시 라라랜드(La La Land)를 세워낸 이 영화는,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다.

소문이 자자했다. 대단한 영화 〈위플래쉬〉를 만든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이번엔 더 대단한 영화를 내놓았다는 소문이었다. 두 주연배우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의 연기가 별처럼 반짝이는 로맨스이면서, 재즈를 기반으로 만든 아주 멋진 음악들이 또한 별처럼 쏟아지는 뮤지컬이라고 했다. 그러니 ‘재미있는 영화’이리라 기대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막상 내 눈으로 확인한 영화는 기대와 달랐다. 소문과 달리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이건 재미있는 영화 이상의, 실로 엄청난 무엇이었다.

대단한 감독이 만든 더 대단한 영화

‘꿈을 좇는 젊은이들의 로맨스’는 흔해빠진 이야기다. ‘배우가 되고 싶은 여자’와 ‘음악으로 성공하고 싶은 남자’의 만남은 이미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그런데도 〈라라랜드〉는 “오랜만에 만나는 가장 창의적인 영화”(미국 영화 잡지 〈버라이어티〉)라고 말하게 만든다. “솔직히 너무 행복해서 울었다”(영국 신문 〈텔레그래프〉)라는 한 줄 평이 곧 나의 감상평이 된다.

이 영화는 제각각의 악기들이 서로 격렬하게 충돌하다가 어느새 한 몸으로 어우러지는 재즈 연주를 닮았다. 춤과 노래,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도전과 좌절, 현실과 몽상, 그리하여 너와 내가, 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동시에 같은 무대에 오른다. 각자의 솔로 파트를 마음껏 뽐내다가 문득문득, 황홀한 합주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관객이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이, 그들은 스크린 밖으로 튕겨 나오는 것 같은 착시를 경험하게 한다.

내가 잠시 잊고 있던 모든 것을 〈라라랜드〉가 한꺼번에 일깨웠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 내가 극장에 가는 이유, 내가 엠마 스톤을 사랑하는 이유. 그리고 내가 가끔 밤하늘을 쳐다보고 내가 때로 가로등 아래 텅 빈 벤치에 이유 없이 걸터앉는 이유까지도.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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