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텔레비전에서 윤희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브라우니를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윤희가 대뜸 물었다. “아빠, 저거 만들 줄 알아?” “물론이지!” “아니, 떡 말고 브라우니.”

브라우니 이야기에 웬 떡? 다 사연이 있다. 나는 대학에서 식품가공학을 전공하면서 제빵 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당근 케이크, 스펀지케이크, 식빵, 쿠키 등등 갖가지 빵을 만들어 학교에서 판매까지 했던 실력자였다. 결혼하고 윤희를 키우면서 옛 실력을 발휘하겠다며 식빵을 만든 적이 있었다. 20년 전의 실력은 온데간데없었다. 식빵은 죄다 겉이 딱딱한 떡이 되었다. 이후 윤희는 내가 만드는 반찬은 믿어도, 빵은 믿지 않았다.

ⓒ김진영 제공

브라우니는 버터·초콜릿·설탕·달걀·밀가루로 만드는, 초콜릿 향이 풍부한 케이크의 일종이다. 대학 시절에 만들어본 적은 없지만, TV 화면을 보니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반죽하고 발효시킨 뒤 숙성까지 거쳐야 하는 식빵과 달리 순서에 따라 재료만 섞으면 그만인 듯 보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몇 가지 레시피를 고르고 그중 가장 맛있어 보이는 것을 골랐다. 가장 맛있다는 의미는, 사실 가장 만들기 어렵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슈퍼마켓에서 재료를 사는 사이 윤희에게 찬장 구석에 있던 저울을 꺼내 닦게 했다. 맛있는 브라우니를 먹기 위해서 작은 노동이라도 해야 제대로 된 맛을 알 수 있다는, 교훈 뚝뚝 떨어지는 말까지 했다. 준비한 재료를 순서대로 놓고 만들기 시작했다. 설탕과 달걀을 섞어 크림을 만드는 게 첫 번째였다. 설탕과 달걀로 제대로 크림을 만들지 못하면 굽는 사이 조직이 무너진다. 떡이 된다는 이야기다. 자동 거품기가 없어서 손으로 거품기를 돌려 크림을 만든 게 실수였다.

얼추 반죽을 완성해 오븐에 구웠다. 오븐에서 피어오르는 맛난 향은 내 기대감을 부풀렸다. 그러나 다 구워진 브라우니를 꺼내기 위해 오븐을 열었다가 좌절했다. 짙은 초콜릿 향이 침샘을 자극했지만, 모양이 이상했다. 굽기 전보다 볼륨이 푹 꺼진 브라우니가 빵틀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빠 아직 안 익었어?” “으음… 냄새는 좋아.” 내 자존심처럼 널브러진 브라우니를 윤희에게 보여줬다. “아니, 이게 뭐야? 떡라우니 만드셨어요? 으하하.” 나도 따라 웃었지만 속으로는 눈물이 났다. 그날 이후 몇 차례 더 도전했지만, 그때마다 떡라우니였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자위하며 브라우니를 잊고 살았다.

몇 주 전 카카오봄이란 초콜릿 전문점에서 커버추어 초콜릿(수제 초콜릿을 만드는 재료)을 얻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다시 한번 브라우니 만들기에 도전했다. 한두 번 실패한 것도 아닌지라 또 한 번 실패작을 두고 둘이 낄낄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복잡한 레시피를 버리고 최대한 간단한 걸 택했다. 거기에 손 반죽 대신 믹서에 거품기를 달아 크림을 만들었다. 재료가 잘 섞이고 공기가 잘 혼합되도록 했다. 반죽하고 굽는 것을 본 윤희가 혀를 끌끌 차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얼굴 표정에 기대감이 1%도 없다.

커버추어 초콜릿으로 브라우니 도전해서 성공

반죽을 오븐에 넣고 20분쯤 시간이 흘렀다. 오늘은 만회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오븐을 열었다. 딱 봐도 제대로 된 것 같았다. 브라우니를 식힌 다음 칼로 써니 촉감이 좋다. 한 조각 입속에 넣었다. 혓바닥 힘만으로도 살살 부서진다. 브라우니는 씹기도 전에 입안에 초콜릿 향을 듬뿍 남기고 이내 사라졌다.

큰 소리로 “김~윤!” 당당하게 불렀다. “왜?”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나온 윤희 코앞에 브라우니를 들이밀었다. “이번에도 냄새는 좋네.” 한입 살짝 물었던 윤희가 남은 조각을 삼키고는 손바닥을 하늘 높이 내민다. 실로 5년 만에 받아본 하이파이브였다. “아빠, 우유 있어?” 다 먹고선 빈 그릇을 개수대에 넣으며 한쪽 눈을 찡긋한다. 딸 키우는 재미가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실패했던 방식으로 다시 한번 해볼까나? 단, 윤희가 없을 때.

기자명 김진영 (식품 M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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