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베테랑〉  〈내부자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번외편으로 영화 이야기다. 아래에서부터의 변혁에 대한 냉소는 스크린에서도 진행됐다. 물론 이 또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이들의 에너지가 응집되던 2012년 대선 전후까지만 해도 이야기가 좀 달랐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육체와 영혼의 존엄이 산산조각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청년 김근태의 삶을 그린 〈남영동 1985〉(2012)나, 임금보다 더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정치를 펼친 광대의 서사를 그린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힘을 합쳐 살인범의 손에서 소녀를 구해내는 평범한 이웃들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이웃사람〉(2012), 여성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을 꾸리다 잡혀간 대학생과 그를 변호하기 위해 속물에서 투사가 된 변호사 노무현의 인생을 묘사한 〈변호인〉(2013) 등은 힘 있는 사람들의 개심을 통한 개혁이 아니라 평범한 장삼이사들의 노력과 각성을 통한 변화를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불의한 내부자가 시스템을 전복시킨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전 사회적으로 정치적 자유의 공간이 줄어들고 변화의 가능성이 질식하면서, 한국 영화는 점차 아래가 아니라 권력 내부의 이탈로 인한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점치게 됐다. 2013년 개봉작 중 〈설국열차〉와 함께 여름 극장가를 양분하다시피 한 작품인 〈더 테러 라이브〉를 살펴보자. 국가에 의해 착취당하다가 사망한 일용직 노동자들의 보상을 요구하던 청취자 박노규(김대명)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급기야 폭탄 테러를 저지른다. 이를 진지한 저널리즘적 접근 대신 일생일대의 시청률을 올릴 기회로 여긴 앵커 윤영화(하정우)는 무리한 생방송을 강행한다. 국가는 제 실책과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프레임으로 모든 것을 묻어버리려 한다.

자신 또한 이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쓰이다가 용도 폐기될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윤영화는 테러범으로부터 건네받은 기폭장치를 작동시켜 자신이 있던 건물을 폭파해 대통령이 연설 중인 국회의사당을 덮치면서 테러를 완성한다. 개봉 당시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를 여러 층위로 비교하는 목소리들이 많았으나, 두 영화 모두 불의한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 참여한 내부자(〈설국열차〉의 남궁민수) 혹은 불의한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기능하던 내부자(〈더 테러 라이브〉의 윤영화)가 안에서 시스템을 전복시킨다는 내용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더 테러 라이브〉는 정치 시스템을, 〈설국열차〉는 자본주의 체제를 뒤집어엎는다.

그나마 이 두 작품에는 시스템에서 배척된 이들이 공범 혹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설국열차〉의 남궁민수(송강호)에게는 꼬리칸 출신 커티스(크리스 에번스)가 있었고, 〈더 테러 라이브〉의 윤영화는 박노규·박신우(이다윗)가 못다 한 테러를 완성하는 역할만을 했으니까. 말하자면 시스템 내부와 시스템 밖의 줄탁동시를 통해 불합리한 체제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영화가 제작되던 2013~2014년만 하더라도 아래에서부터 변화를 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면 시스템 안에서도 누군가 동조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실제로 2014년 여름 극장가를 수놓았던 한국형 블록버스터 대부분은 민초의 활약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작품들이었다. 이순신(최민식)의 영웅적인 희생만큼이나 온 힘을 모은 백성의 존재를 강조했던 〈명량〉, 탐관오리 조윤(강동원)의 횡포를 막아내고 백성으로부터 수탈한 양곡을 빼앗아 돌려줌으로써 정의를 실현하는 의적들 이야기 〈군도〉는 아래에서부터의 변화에 대한 기대를 반영했다.

아래로부터의 변혁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2014년 4월16일 전후 제작에 들어간 영화에서 그런 기대는 점점 자리를 잃어간다. 2015년 여름 극장가에서 폭발적인 흥행을 거둔 〈베테랑〉의 감독 류승완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강조하고 싶었던 영화 속 숨은 영웅은 불의에 맞서 항의하러 갔던 화물트럭 기사 배철웅(정웅인)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영화에서 특권에 젖은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의 횡포에 제동을 걸고 정의를 구현해내는 건 배철웅이 아니라 서도철 형사(황정민)와 그의 광역수사대 팀이다. 분노한 마음에 혼자 따지러 간 철웅이 할 수 있는 건 태오에게 맞다가 의식을 잃음으로써 수사의 빌미를 주는 것까지다. 그는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부상을 당한 뒤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야 비로소 의식을 차린다.

영화는 서도철과 그의 직속 상관 오 팀장(오달수)과 광역수사대장 강 총경(천호진)처럼 시스템 내부에서 일하는 이들이 권력 앞에 비굴해지는 대신 제 임무를 다해야 비로소 배철웅으로 상징되는 상처 입은 서민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비유를 연장하자면 시스템 바깥 아래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불의에 항의하다가 죽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다치는 일까지가 전부이며, 형사들이 재벌 3세를 잡기 위해 벌이는 고군분투는 그 시민이 죽을 만큼 심하게 아파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이야기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등장하는 대중은 무력하기만 하다.

평범한 시민이 도화선이 되기라도 했던 〈베테랑〉과 달리 2015년 하반기 극장가를 휩쓴 〈내부자들〉은 극도의 무력감에 짓눌려 있는 작품이다. 시민이라고 부를 만한 등장인물이 전무하다시피 한 이 작품은 정계와 재계, 그리고 언론이 서로 유착한 상황에서 버림받은 정치깡패와 검사가 의기투합해 이권의 연대를 부숴버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얼핏 보면 권선징악의 희망처럼 보이는 이 결말은 사실 지독한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정치깡패 안상구(이병헌)의 기자회견은 잠시 대중의 관심을 모았으나, 부패 언론인 이강희(백윤식)가 안상구의 과거를 조작하며 프레임 뒤집기를 시도하자 그게 또 먹힌다. 진실을 밝히려던 검사 우장훈(조승우)은 접대를 받는 부패 검사라는 누명을 쓰고 정직당한다.

결국 스스로 비리에 깊이 관여한 ‘내부자’가 된 뒤 폭로를 감행한 끝에 비로소 세상의 신뢰를 산다.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대중은 그 어떠한 능동적인 구실도 하지 못한다. 안상구의 기자회견에 우르르 몰려갔다가, 이강희의 프레임 뒤집기를 납득하다가, 다시 우장훈의 폭로에 분노한다. 시스템 안에서 계획한 대로 반응하는 것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 대중은 이강희의 대사처럼 ‘개·돼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16년 말 한국 시민들이 처한 상황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권자임을 외치며 광장으로 매주 토요일 밀려 나오지만, 누군가는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또 한편에선 탄핵과 조기 대선 정국에 접어들면 세상을 제대로 개혁하자는 목소리 또한 휩쓸려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를 숨기지 못한다. 아래로부터의 변혁은 불가능하다는 듯 깊은 냉소를 표한 2016년판 현실의 〈내부자들〉의 결말에 대해, 한국 시민들은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그건 아마 우리 하기에 달린 일일 것이다.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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