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는 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땅이다.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37년에 발표한 소설 〈소유와 무소유〉는 수도 아바나를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동이 틀 무렵의 아바나를 본 적이 있는가? 거지들이 건물 벽에 기댄 채로 아직도 잠자고 있고, 술집으로 얼음을 실어 나르는 차들조차 보이지 않는 그때를 본 적이 있는가?” 헤밍웨이가 언급한 거지와 술집 이야기는 사실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쿠바의 서글픈 모습이기도 했다. 쿠바는 스페인에서 독립하는 순간에 다시 미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한 비운의 땅이었다. 미국은 쿠바 독립 지도자들이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전쟁(1895~1898)을 벌이던 막바지에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고 끼어든다. 미국-스페인 전쟁(1898)이라 불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한 미국은 쿠바를 자신의 보호령으로 만들어버린다. 1901년 쿠바 헌법에는 ‘플랫 수정조항(Platt Amendment)’이라는 부가 조항이 들어갔다. 그 골자는 “쿠바의 독립을 보전하고, 생명·재산·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적합한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쿠바 내정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협박에 못 이겨 쿠바는 어쩔 수 없이 불평등 조항을 수용했다. 1934년에 이 조항이 삭제되기는 하지만, 그사이에 쿠바 사회에는 이미 친미 세력이 튼튼하게 자리 잡았다.

ⓒAFP PHOTO쿠바 혁명을 이끌었던 체 게바라(왼쪽)와 피델 카스트로(오른쪽). 혁명 성공으로 카스트로는 국가평의회 의장이, 게바라는 중앙은행 총재가 되었다.
1952년에는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이 미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로 들어섰다. 정치뿐만이 아니었다. 경제도 미국에 의존했다. 쿠바는 사탕수수로 만드는 설탕을 수출하는 대신 식량과 석유를 비롯해 나머지 모든 제품을 수입하는 나라였다. 1차 세계대전 무렵 세계 설탕의 4분의 1은 쿠바산이었고, 쿠바 외화 수입의 80%를 차지했는데, 그 설탕의 70~ 80%가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쿠바 경제는 사탕수수 경제이자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한 경제였다.

미국인 투자자들이 쿠바에 대거 몰려와서 농장과 제당소를 사들였다. 미국인이 소유한 제당소가 생산한 설탕은 1906년에 전체 설탕의 15%에서 1928년에는 75%로 급격히 늘어났다. 사탕수수 부자들은 미국적인 생활을 누렸다. 이들은 농장이 아니라 모두 아바나와 뉴욕 같은 도시에 살면서 요트 클럽을 만들고 카지노를 즐기며 특권층끼리 사교를 즐겼다. 부자들의 스페인어에는 영어가 침투했고, 미국적 스포츠인 야구가 쿠바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미국인 관광객들은 ‘태양과 섹스(sun-and-sex tourist)’를 좇아 쿠바로 쇄도했고, 아바나 곳곳에 매춘업소가 들어섰다. 또한 독재정권은 미국 마피아들에게 카지노를 허용했는데 그 수익금은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아바나는 ‘미국의 환락가’가 되었다.

그러나 쿠바 국민 다수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다. 노예에서 해방된 이후 사탕수수 노동자가 된 이들은 1년에 4개월, 오직 사탕수수 수확철에만 일할 수 있었고, 나머지 8개월은 실업자로 살아야 했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문장 속에서 아바나는 거지와 술집이 등장한 것이다.

ⓒWikimedia미국이 쿠바 피그스 만에 침투시켰던 쿠바 망명객 출신 부대원들이 쿠바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 첫 전투는 참패

그런 광경을 바꿔보려고 쿠바 혁명이 일어난 것이 그 무렵이었다. 1956년 11월25일 멕시코 만에 위치한 항구 툭스판(Tuxpan)에서 요트 한 척이 출발한다. 그란마(granma)라고 불리는 이 작은 배에는 정원을 초과해 게릴라 82명이 올라탔다. 이들은 모두 “7월26일 운동(Movimiento 26 de Julio)”이라는 무장조직의 성원들이었다. 그 배에는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현재 국가평의회 의장) 등 쿠바인 게릴라들은 물론이고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였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승선했다. 이들은 모두 멕시코에서 군사훈련을 마치고 쿠바에서 게릴라 전쟁을 벌여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겠다는 결의로 가득 찼다.

형제지간이기도 한 피델과 라울은 약 3년 전인 1953년 7월26일에 쿠바 동남부의 산티아고 시에 있는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독재정권에 무기로 맞서기 위해 벌인 일이었는데 다소 무모했다. 이들 형제와 함께 공격에 참가한 165명 청년 모두는 군경에게 학살당하거나 체포되었다. 피델과 라울은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이 수감된 지 2년째에, 독재자 바티스타는 자신의 포용력과 여론의 호의를 끌어내기 위해 사면을 단행했다. 운이 좋았던 이들은 출소하자마자 멕시코로 건너가 동지들을 규합했다. 몬카다 병영의 지도자는 물론 피델이었지만, 습격 당시 더 많은 유혈 사태를 막은 것은 신중한 라울 카스트로의 기민한 대처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그때부터 피델은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가, 라울은 매우 신중하고 기민한 조직가였다.

이들과 함께 배를 타고 멕시코만을 가로지른 게릴라 중 단연 눈에 띄는 이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 체 게바라였다. 그는 1954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주도하여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개혁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현지에서 직접 목격했다. 미국 과일회사인 유나이티드프루트컴퍼니는 당시 과테말라의 대지주였는데, 이 회사 소유 토지를 국가가 수용해 분배하겠다고 하자 미국이 정부를 무너뜨린 것이다. 체 게바라는 이때 중남미 어느 국가에서 개혁을 시도해도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렇다면 자신의 전장은 중남미 어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과테말라에서 미국에 분노한 아르헨티나 의사는 그란마호에 승선해 쿠바로 출발했다.

ⓒTASS/div〉‘쿠바 미사일 위기’를 일으킨 흐루쇼프(왼쪽)와 존 F. 케네디.
12월2일 게릴라들은 쿠바 동남부 해안에 도착했고, 사흘 뒤에는 정부군과 첫 전투를 벌였지만 대패한다. 생존자는 고작 8명, 그들은 모두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으로 도주해 그때부터 약 2년간 8만명의 정규군과 싸웠다. 게릴라 지도자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취한 전략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국적으로 정치전선을 조직해 쿠바 국민들의 지지를 모아내는 것, 다른 하나는 쿠바 독재자와 미국의 결탁을 무너뜨리는 전략이었다. 전형적으로 아군 형성, 적군 분열 전략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모두 성공했다.

피델은 미국이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더 후원하지 못하게 하려고 꾀를 내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뉴욕 타임스〉의 베테랑 특파원 허버트 매슈스를 게릴라 산채로 불렀다. 매슈스의 기사는 1면 특종으로 실렸는데, 그 글에서 독재자는 잔인하고 무능한 반면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게릴라들은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개혁가로 묘사되었다. 게릴라들은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들이 되었다. 국내외 여론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청년들이 대거 반군에 합류했고, 체 게바라를 비롯해 반군 사령관들은 전투에서 승승장구했다.

1958년 12월31일 게릴라에 대한 지지가 급속히 늘어나고, 여론을 의식한 미국이 무기 지원마저 중단하자 독재자 바티스타는 도망치고 만다. 바티스타는 참모들과 일가 친족들을 비행기에 가득 태우고 무자비한 독재자 트루히요가 지배하고 있던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줄행랑쳤다. 그리고 1959년 1월8일 게릴라 군들이 마침내 수도 아바나로 입성했다. 혁명이 일어난 해, 쿠바는 독재에서 벗어난 해방감, 새 나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이런 환희는 곧 전쟁의 공포로 바뀌었다.

초기부터 미국은 쿠바 혁명에 적대적이었다. 미국은 1961년 1월에는 쿠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1961년 4월17일에는 쿠바를 침공하면서 아예 혁명정부를 전복하고자 시도한다. 그 유명한 ‘피그스 만 침공 사건’이다. 미국은 망명 쿠바인들을 훈련시켜서 쿠바 섬 남쪽에 있는 피그스 만에 상륙시켰지만, 원정 대원 대부분이 포로로 체포되어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직접 탱크를 타고 전쟁을 지휘해 침략군을 물리쳤다. 미국은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쿠바 혁명 후 미국인 소유 농장과 회사 국유화

미국의 적대정책으로 쿠바 정부는 더욱 소련과 가까워졌다. 혁명 초기 피델 카스트로는 민족주의자에 더 가까웠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이 피그스 만 침공을 벌인 이후에는 쿠바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선언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평생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때는 냉전 시기였으므로 혁명정부가 살아남으려면 소련과 손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냉전 시대 내내 쿠바와 미국은 적대국으로 대결했다. 1962년 10월 쿠바는 안보에 위협을 느끼고 소련제 중거리 미사일을 설치하려 했다. 이번에는 미국에서 안보 위협을 느끼고, 케네디 정부가 소련 군함의 접근을 막기 위해 해상을 봉쇄했다. 쿠바를 두고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벌일 기세로 며칠간 대치한 것이다.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지 않는 대신 미국도 쿠바를 다시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위기는 일단 해소되었다. 그 뒤 1966년 미국은 쿠바에 대한 전면적인 금수조치를 취했다.

쿠바는 심각한 안보 위기 속에서도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갔다. 혁명정부의 목표는 명확했다. 정치적으로 독립국가, 경제적으로 자립국가, 모두가 평등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혁명 직후인 1959년 5월 쿠바는 가장 시급한 개혁인 토지개혁에 착수한다. 1000에이커(404만6856㎡) 이상의 농장 토지를 유상으로 수용한 뒤에 자영농이나 협동조합에 분배하는 방식으로 대토지 소유제를 해체하고자 했다. 또한 외국인이 쿠바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금지했다. 쿠바 대농장과 제당소를 소유한 미국인들이 반발한 것은 물론이다. 나아가 쿠바 정부는 정유·전력·전화 회사 등 미국인 소유 기업들도 국유화했다.

또한 쿠바 혁명정부는 농촌 빈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문맹·질병·영양실조·판자촌 등의 현실을 바꾸기 시작했다. 문맹 퇴치 운동으로 사실상 문맹을 사라지게 만든 후에는 중남미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교육제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빈곤 가정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에서 시작한 무상 의료제도는 훗날 세계적인 의료제도로 자리 잡아 혁명의 성취로 남았다. 영양실조를 해결하기 위해 실시된 배급제도로 국민들에게 기본적인 먹을거리를 제공해 빈곤과 기아를 없애고, 공공주택을 대규모로 건설해 주거 환경을 개선했다.

미국은 턱밑에서 벌어진 쿠바 혁명이 냉전 시기에 중남미 대륙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했다. 미국이 냉전기 내내 반공 독재정권과 손잡고, 민주 선거로 선출된 개혁 정부와 좌파 정부를 전복시키는 등 중남미 전역에서 초강경 모드를 유지한 것이 바로 쿠바 혁명 이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 혁명은 중남미 전역에서 반공 극우 정권에 맞서 무장투쟁을 선언한 게릴라들의 모델이 되었다. 냉전기 내내 미국에게 혁명 쿠바는 지속적인 골칫거리였지만, 중남미 게릴라들에게는 거대한 골리앗 미국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다윗으로 남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냉전의 승자가 미국이라는 것이 확실해자 쿠바는 순식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외톨이가 되었다. 1980년대 중남미 민주화 이후 집권한 중도 우파 정부들은 좌파인 쿠바를 외면했다. 심지어는 야당으로 변신한 좌파들에게도 쿠바 혁명 체제는 더 이상 대안으로서의 매력이 없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 시기를 “미국의 144㎞ 앞에 있는 우리는 서양에서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다”라고 묘사했다.

기자명 박정훈 (중남미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