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임기 단축”을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1월29일 3차 대국민 담화에서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이 퇴진 선언이 아니라 일종의 ‘역공’이라는 데는 여야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야 3당(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에 새누리당 비박계까지 결합한 국회의 탄핵 단일대오를 갈라치기하는 수였다. 이 선언 이후 새누리당 비박계가 ‘원대 복귀’ 조짐을 보이고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엇박자를 내는 등 탄핵 기세가 한풀 꺾였다. 11월 한 달을 광장에서 지내다시피 했던 ‘촛불 민심’은 탄핵에 변수가 생기자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 게임에 자신의 임기를 ‘베팅’하는 장면이야말로 진정으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헌법에 의한 임기 보장은 대통령제의 본질에 해당한다. 11월의 촛불은 이 본질을 베팅해야 할 만큼 대통령을 차근차근 궁지로 몰아넣었다. “촛불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라는 무용론이나 평화집회 한계론은 이 결정적인 대목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시사IN 신선영11월26일 제5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이날 전국적으로 190만명이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비교정치학의 거장인 아렌드 레이프하트 교수는 〈민주주의의 유형〉에서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의 근본적 차이를 이렇게 비교한다. “의원내각제에서의 정부 수반은 입법부에 의해 선출되고 입법부에 해산될 수 있다. 대통령제에서의 정부 수반은 인민에 의해 선출되고 헌법에 따라 재임 기간을 보장받는다.” 대통령제에서 탄핵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대통령 임기는 불가침이다.

의원들이 뽑는 의원내각제의 수상과 달리, 대통령은 전국 인민으로부터 직접 선출된다. 민주주의에서 이보다 강력한 정통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대통령 선거는 입법부 선거와는 별도로 이루어진다. 입법부와 정부 수반의 정통성 원천이 서로 별개다. 그래서 서로를 무너뜨리는 데도 제약이 크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은 재적 인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과 헌법재판소 심판을 요구한다.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나라에서 대통령제는 보기 드물다. 레이프하트 교수는 2012년 기준으로 공고한 민주주의 국가 36개국 중에서 대통령제 국가를 겨우 6곳 지목했다. 한국·미국·프랑스·아르헨티나·코스타리카·우루과이다. 공고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임기 단축은 더 보기 드물다. 230년 대통령제 역사를 가진 미국에서도 살아 있는 대통령의 중도 사임 사례는, 워터게이트로 탄핵 소추 진행 중에 물러난 리처드 닉슨 단 한 명이었다. 세계 각국의 정권 붕괴 뉴스를 따져보면, 대부분 의원내각제의 수반이거나 민주주의 공고화 이전 단계 국가의 대통령이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의원내각제였으면 진작 정권이 붕괴했을 상황이지만, 대통령제는 제도 속성상 정권 붕괴가 대단히 드물다. 대통령의 입에서 임기 단축 언급이 나온 것 자체가 중대한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촛불 민심의 처지에서 보면, 난관은 또 있었다. 입법부가 구성상 탄핵에 호의적이지 않다. 집권당인 새누리당은 129석(김용태 의원 탈당 후에는 128석)을 보유해, 탄핵 저지선인 101석을 훌쩍 넘긴다. 입법부 역시 총선이라는 최고 수준의 정통성을, 대통령과 별개 경로로 확보한 기구다. 촛불 민심이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시키려면 서로 별개이면서 둘 다 강력한 ‘정통성’을 동시에 흔들어야 한다. 대통령제가 산출하는 ‘이중의 정통성’이 동시에 대통령을 보호하고 있었다. 사태 초기에 야권이 탄핵을 고려하지 않은 반면 오히려 청와대가 “차라리 탄핵하라”고 도발했던 맥락이다. 탄핵으로 가는 길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다.

촛불의 기세에 대통령은 ‘버티기’ 포기

대통령 연설문 작성에 최순실씨가 관여했다고 시인한 10월25일 1차 대국민 담화로 돌아가 보자. 이 시점에서 박 대통령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두 개였다. ‘사과로 수습하기’ 또는 ‘2선 후퇴와 책임총리 임명’이었다. 후자는 야권의 요구였다. 임기 단축은 보기에도 없었다. 박 대통령은 당장 덜 고통스러운 ‘사과로 수습하기’를 골랐다. 2선 후퇴만 해도 굴욕적인 패배라는 기류였다. 야권의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10월28일 “탄핵이나 하야 운동으로 갈 생각은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시사IN 이명익11월29일 박근혜 대통령은 제3차 대국민 담화에서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에 맡기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덜 고통스러운 선택이 결국 더 골치 아픈 결과를 불러왔다. 여론과 광장이 반응했다. 10월 마지막 주 국정수행 지지도(한국갤럽)는 17%로 전주 25%에서 폭락했다. 10월29일 토요일, 1차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주최 측 추산 2만명이 모였다. 그다음 주 11월4일, 박근혜 대통령이 2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박 대통령의 사과는 좀 더 길고 구구절절했지만,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다”라는 유행어 말고는 별다른 결과를 남기지 못했다.

11월5일 토요일, 2차 촛불집회가 열렸다. 일주일 만에 시위 규모는 열 배로 불어났다. 주최 측 추산 20만명이 모였다. 하루 전날 나온 국정수행 지지도는 5%로, 민주화 이후 모든 정부를 통틀어 최저치였다. 이때는 ‘사과로 수습하기’ 옵션은 이미 봉쇄되어 있었고, ‘버티기’와 ‘돌이킬 수 없는 2선 후퇴’ 중에 골라야 하는 단계였다. 11월8일 정세균 국회의장을 찾아간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가 추천한 후보를 총리로 임명해 실질적으로 내각을 통할하도록 하겠다”라고 제안한다. 2선 후퇴 선언도, 책임총리 보장도 없이, ‘내각 통할’이라는 헌법상 표현만 반복한 버티기였다. 역시 당장 덜 고통스러운 쪽을 골랐다.

다시 토요일이 돌아왔다. 11월12일은 전운이 감돌다시피 했다. 이날은 낮부터 서울 광화문과 시청 일대가 통행이 불가능할 만큼 사람의 물결로 들어찼다. 주최 측 추산으로 100만명을 돌파하는, 한국 집회사를 새로 쓴 날이었다. 정통성의 한 축인 입법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1월15일 새누리당 내에서는 당내 비주류 모임인 비상시국회의가 결성된다. 이후 비상시국회의는 탄핵 참가를 검토하는 등 사실상 ‘여당 내 야당’으로 움직였다.

더 의미심장한 기류는 검찰에서 나왔다. 꼬리 자르기와 면죄부 수사가 될 것이라던 전망과 달리, 검찰은 박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누었다. 11월20일 나온 공소장(피고인 최순실·안종범·정호성)은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을 주범으로 지목했다. 광장의 폭발적인 압력이 없었다면 검찰이 이토록 과감한 수사를 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이제 2선 후퇴 정도로는 수습이 어려워졌다. 11월12일 이후로 박 대통령 앞에 놓인 선택지는 ‘청와대 문을 걸어 잠그는 농성’과 ‘임기 단축’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번에도 대통령은 더 쉬운 선택을 골랐다. ‘농성’이었다. 대국민 담화는 없었다. 검찰 수사를 거부하고, 몇 종류의 인사권을 행사하면서 은근슬쩍 직무 복귀를 타진했다. 100만 시위대가 주말마다 운집하고 국정수행 지지도가 4~5%에 고착된 상황에서 어처구니없는 시도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통령제는 그마저도 가능하게 한다. 최고의 정통성을 일단 부여받은 대통령의 임기는 여론이 아니라 헌법이 보장한다. 광장의 압력으로 대통령이 퇴진하는 선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새누리당 친박계와 보수 논객들의 주장에는 일정 부분 진실이 담겨 있다. 광장에 몇 명이 모이든 대통령 선거 이상의 정통성이 부여되지는 않는다. 작정하고 ‘농성’하는 대통령을 정당하게 끄집어낼 수단은 없었다. 교착상태로 들어갔다.

 

 

 

 

ⓒ연합뉴스11월30일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왼쪽부터)가 모여 대통령 탄핵 일정을 논의하고 있다.

 


이 교착을 뚫어낸 것도 결국 촛불이었다. 11월19일 전국으로 산개한 촛불이 지역구 국회의원들에게 발등의 불을 떨어뜨렸다. 주말 촛불이 타오르면 주중에 사태가 훌쩍 전개되는 패턴이 몇 주째 이어졌다. 11월21일에는 국민의당이, 11월23일에는 민주당이 탄핵 추진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새누리당의 분열도 더 빨라졌다. 11월23일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가 대선 불출마와 탄핵 추진을 선언했다. ‘야 3당+새누리당 비박계’라는 탄핵 대오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선택지에서 ‘농성’이 제거되었다. 대통령제의 강한 정통성이 보장해주던 마지막 보루가 탄핵이 구체화되면서 사라졌다. “차라리 탄핵하라”던 청와대의 기세도 쑥 들어갔다. 11월26일 토요일, 주최 측 추산으로 전국 합산 190만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기록을 또다시 썼다.

11월29일, 박 대통령이 3차 대국민 담화에 나섰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퇴진을 내건 도박’과 ‘이대로 탄핵 부결을 바라는 도박’ 두 가지였다. 대통령은 ‘퇴진을 내건 도박’으로 판을 흔들어 변수를 만드는 길을 택했다. “퇴진 시점을 국회가 정해달라”고 공을 넘기면서, 탄핵 대오로 향하던 새누리당 비박계를 일단 멈춰 세우는 데 성공했다. 비박계는, 대통령을 질서 있는 퇴진으로 유도할 수만 있다면 탄핵보다 그 편이 낫다고 계산했다. 당도 깨지지 않고, 대선을 대비할 여유도 좀 더 벌 수 있다. 이 3차 담화를 두고 “대통령의 묘수가 상황을 반전시켰다”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 자체로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선택지 자체가 터무니없이 나빠져 있었다. 10월25일의 선택지 ‘사과로 수습하기’와 ‘2선 후퇴와 책임총리 임명’과 비교해보자. 10월25일에는 더 고통스러운 선택이라고 해봐야 2선 후퇴였다. 11월26일에는 두 선택지 모두 임기가 걸린 도박이었다. 이 공화국의 대통령은 자신을 지켜줄 대통령제의 본질을 판돈으로 내거는 상황으로까지 몰렸다.

12월2일 야 3당은 12월9일 본회의에 올릴 예정으로 탄핵안을 발의했다. 이제 12월9일까지는 그 누구도 가보지 않았던 격변의 일주일이 예정되어 있다. 구도는 단순하다. 새누리당 비박계의 탄핵 동참 규모가 결과를 가른다. 탄핵 가결까지는 산술적으로 28표(야 3당과 탄핵 찬성 무소속이 모두 찬성표를 던질 경우 172표다), 불참과 반란표를 감안해 40여 표가 필요하다.

‘촛불 무용론’과 ‘평화시위 한계론’ 꿈틀

하지만 변수는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다. 대통령의 3차 담화 이후 청와대는 “퇴진 일정은 여야 합의로 가져와달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대통령은 3차 담화에서 “임기 단축”을 꺼내들었지만 퇴진 시점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새누리당은 당론으로 ‘내년 4월 퇴진’을 내걸었다. 헌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때 가서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다. 대통령 임기 단축의 구체적인 내용과 보장책이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이미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10월25일 1차 담화)라는 약속을 뒤집은 이력이 있다.

 

 

 

 

ⓒ연합뉴스11월23일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가 국회 의원회관에서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뒤 인사하고 있다.

 


새누리당 비박계는 청와대에 12월7일까지 퇴진 시점을 확정해달라고 요구했다. 대통령이 직접 퇴진 날짜를 못 박아야 탄핵으로부터 후퇴할 명분이 생긴다는 계산이었다. 그런 보장 없이 탄핵 대오에서 빠졌다가는 분노한 민심의 폭발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야권에서는 대통령이 12월7일 이전에 “4월 퇴진 선언”을 내놓음으로써 비박계를 붙들어 앉히고 탄핵 시도를 무력화하리라는 관측이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박 대통령이 보여준 패턴대로라면, ‘퇴진일 못 박기’보다는 덜 고통스러운 선택인 ‘국회에 공 넘기기’를 고수하다가 탄핵 가능성을 키울 거라는 예측도 있다. 12월2일자 〈조선일보〉는 사설로 대통령의 4월 퇴진 선언을 종용하면서, 덜 고통스러운 선택으로 자주 미끄러지는 대통령을 견제했다.

12월6일과 7일에는 박근혜 게이트 관련 주요 증인들이 출석하는 청문회가 열린다. 사건 당사자들과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출석한다. 검찰 수사에서 나온 박 대통령의 혐의 사실이 당사자들의 증언으로 생중계되기만 해도 파장이 클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제기된 의혹에 직접 답하는 끝장 토론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사된다면 이 역시 탄핵 향방을 가를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

3차 담화로 대통령이 탄핵을 모면할 가능성이 다시 올라간 것만으로도 SNS 등 온라인에서는 ‘촛불 무용론’ ‘평화시위 한계론’이 넘실거렸다. 갈수록 여론을 증폭시키는 광장의 정치는 완전하고 전면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승리만을 요구하며, 그에 조금이라도 못 미친 승리는 패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을 돌이켜보면 광장은 대단한 전진을 이끌어냈다. 고비마다 대통령은 어김없이 더 근본적인 처방은 외면하고 덜 고통스러운 옵션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대통령제가 보장하는 강력한 정통성 뒤에 숨어서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버텨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주말의 광장은 대통령의 기대와 반대로 사태를 더 증폭시켰고, 다음 주의 대통령은 더 나쁜 상황에서 더 나쁜 선택지를 받아들어야 했다.

많을 때는 100만 단위 인파가, 주말 대공세를 한 달에 걸쳐 흔들림 없이 유지했다. 시위대는 고립을 자초할 수 있는 폭력 사태도 놀라울 정도로 제어해냈다. 폭력 회피는 ‘보수화’의 징후라기보다는 차라리 ‘전략 기조’에 가깝게 폭넓은 합의로 관철되었다. 그런 광장을 빼고 대통령의 놀라운 추락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그 최종 결과가 탄핵 가결이 아니라 해도, 그것을 광장의 패배로 해석할 이유 역시 없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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