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황남대총은 너비가 동서 80m, 남북 120m에 이르는 한반도 최대 고분이다. 위는 발굴 당시 작업 모습.
황남대총은 경주시의 신라 시대 고분 가운데 가장 큰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한반도를 통틀어 최대 고분이기도 하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뻗은 두 개의 봉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너비가 동서 80m, 남북 120m에 달한다. 높이는 남쪽 봉분이 23m, 북쪽 봉분은 24m다. 적석목곽분은, 시신과 장신구 등을 넣은 나무 덧널 위에 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덮은 형태의 무덤을 이르는 명칭이다. ‘돌무지 덧널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마총 역시 적석목곽분이다.

워낙 거대한 고분이었기 때문에, 관련 기술이 미숙했던 1970년대 초반 당시 ‘경주 발굴단’은 황남대총 발굴 작업을 몹시 꺼렸다. 특히 자신의 지휘와 책임 아래 황남대총을 파야 했던 김정기 단장은 내내 미온적이었다. 규모가 너무 커서 어떻게 발굴해야 소중한 문화유산을 훼손하지 않을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리저리 피해갈 궁리만 하던 김정기 단장이 낸 묘안이 바로, 주변의 작은 무덤을 먼저 파본 뒤 그 성과에 따라 황남대총 발굴 여부를 결정하자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만만하게 생각했던 천마총에서 금관을 비롯한 수많은 황금 유물이 쏟아지고 천마도까지 나와버렸다. 발굴단으로서는 더 이상 ‘황남대총만은 손댈 수 없다’고 버틸 근거가 사라졌다.

작업 주체인 발굴단이 이토록 회의적이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황남대총을 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것이 틀림없다. 그랬기에 발굴 작업이 이뤄졌을 것이다. 이 거대한 고분을 파자고 누가 처음으로 주장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어떤 사람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경주를 지나다 황남대총을 보고 ‘저걸 파라’ 하고 지시했다고 말한다. 국사학계 거두로 꼽히는 두계 이병도 박사가 제안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주장도 ‘팩트’로 확정할 만한 결정적 근거는 없다. 다만 박정희 정부 내에 ‘적극적인 발굴론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바로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정재훈 사무관이었다.

ⓒ연합뉴스2010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황남대총 유물 특별전.
박정희 시대가 배출한 민간 부문의 ‘문화재 스타’가 김정기였다면, 정재훈은 행정 부문에서 독보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1963년 총무처 특별채용(요즘으로 치면 9급 공무원)으로 문화재관리국에 들어간 정재훈은 1970년대 초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사업에 따라 공무원 인생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일개 사무관으로서 박정희 앞에 당당히 나가 문화재 현안에 대해 설명하게 된 것이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을 독대한 사람도 그였다. 이런 인연과 업적 때문인지 정재훈은 문화재 정책을 집행하는 최고 수장 자리인 문화재관리국장까지 오른다.

다만 박정희 시대에 워낙 빨리 승진을 거듭한 탓인지 장년기에는 한직으로 좌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993년, 문화재관리국장이던 정재훈이 느닷없이 문화체육부 생활체육국장으로 발령 났다. 문화재 전문 행정가인 그에게 생면부지의 체육국장 자리는 한직이나 다름없었다. 문화부장관실은 썰렁하기만 한데, 문화재관리국장 방에는 항상 민원인으로 넘쳐나는 일을 장관이 용납할 수 없었다는 후문도 있다.

이런 이력을 보면 정재훈은 마치 ‘박정희에게 잘 보여서 잘나갔던 공무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재훈은 자질을 인정받은 대단한 학자이기도 했다. 독학으로 한국 전통조경학(환경 및 경관의 계획·설계·시공·관리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해서, 지금은 이 부문의 가장 중요한 개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본인 스스로도 조경학도임을 자처했다. 박정희 정권 내내 추진된 경주 개발 계획 역시 정재훈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정재훈은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기에 누구보다 발언권이 셌는데, 이를 발판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문화재 정책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정재훈 자신의 증언이므로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생전의 그는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가운데 문화재 분야의 얼개는 내가 잡았다”고 말하곤 했다.

“신라무덤 내부 공개하고 관리 재원 확보하자”

경주 개발 이전까지 한국의 문화재 정책은 개별 유적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이런 문화재 정책의 틀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 바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다. 도시계획 용어를 빌려 설명한다면, 특정 지역을 지구 단위로 나눈 다음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경주 개발에서 처음으로 채택했다. 예컨대 경주 일대에 포진된 문화재의 경우, 13개 사적지구로 나눠 종합적인 보수·정비를 한다. 정재훈은 이 같은 ‘문화재 지구로 범주화한 보수·정비 계획’을 사무관 시절인 1968년에 구상했고,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 기관지인 〈문화재〉 제5호에 발표하기도 했다. 발표 시점인 1970년은, 박정희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한 시기(1971년)보다 1년 빠르다. 이런 정황을 따져보면, 경주 개발 계획 가운데 적어도 문화재 부문의 골격을 잡은 사람은 정재훈이 맞는 듯하다.

정재훈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에게 적극적으로 황남대총의 발굴 필요성을 ‘진언’한 사람도 자신이다. “경주의 신라문화사를 밝히려면 대형 고분을 학술적으로 개척하고 발굴할 필요가 있다고 대통령께 보고했어요. 제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경주 발굴에서 고분(만) 발굴하는 발굴팀을 얘기했어요.” ‘발굴 전단팀’을 만들어달라고 박정희에게 건의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재훈은 단순히 발굴 자체의 성공에만 만족하지는 않았다. 문화 유적의 관리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대통령께 발굴조사를 하려면 굉장히 많은 시간과 예산이 필요하다고 했지요. 황남동 98호분(황남대총) 표형분(瓢形墳·표주박 모양으로 봉분 두 개를 붙인 무덤)을 발굴조사하여 공개 전시하면 일제가 왜곡시킨 신라문화사를 바로 밝히고, 그 입장료 수입으로 경주 문화 유적의 관리 재원이 확보될 수 있다고 보고했어요. 황룡사지와 월성 등의 시가지화한 지역을 매입하고 발굴조사 및 정비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한반도에서 가장 큰 신라 무덤을 파서 내부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여기서 나오는 관람료 수입을 경주 지역의 문화재 보존·관리에 활용하자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요즘엔 지방자치단체들이 그 고장의 유적지나 심지어 전설을 수익 사업화하는 경우가 많지만, 1970년대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이처럼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는 사업을 30대 젊은 사무관이 겁 없이 대통령한테 직접 보고하고 마침내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으니, 정재훈의 배짱이 보통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정재훈이 주목한 것은 황남대총의 규모였다. “그 고분을 열면 한 200명 들어가도 충분히 수용 가능할 것 같았다.” 관람객을 많이 수용할 수 있다면 관람료 수입도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황남대총에 대한 정재훈의 당초 계획이 완전히 달성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황남대총의 내부를 구경할 수 없다. 황남대총 대신 그 직전 발굴된 천마총 내부를 공개하는 것으로 타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마총을 통해서나마 신라 적석목곽분의 내부 공개가 실현된 만큼 정재훈의 꿈이 어느 정도는 이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자명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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