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의 풀림과 헝클어짐은 그 일의 시작점에서 비롯되게 마련이야. 하물며 전쟁 또는 그에 준하는 대재앙을 만났을 때 초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

1941년 6월22일 독일의 침공을 맞은 옛 소련이 그랬어.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와는 상극이라 할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어.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나치 독일 총통 히틀러의 약속을 굳게 믿고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는 일체의 정보를 물리쳤어. 독일 탈영병이 소련군에게로 넘어와 공격 준비가 끝났다고 전해줘도 마이동풍이었고, 공격 전날에도 혹여 전방의 장군들이 독일군 비위를 거스를까 봐 “어떤 도발에도 대응하지 마라”고 특별히 명령할 정도였어. 침공 전에 있었던 어느 공식 석상에서 악명 높은 소련 비밀경찰 수장 베리야는 스탈린에게 이런 아부를 해. “우리 국민과 저는 독일이 결코 소련에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당신의 현명한 예언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그 모든 맹신을 비웃듯이 400만 대군을 동원해 수천㎞에 이르는 소련 국경선을 돌파했고 소련군 전투기 수천 대는 떠오르지도 못하고 잿더미가 되었다. 수십만 명 단위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거나 전사하거나 흩어져버렸어. 그 이름대로 ‘강철’ 같은 신경줄을 자랑했던 독재자 스탈린(러시아 말로 강철이란 뜻이야)도 거의 넋이 나갔다고 해.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나타난 그는 더듬더듬 부하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해. “우리가 그들에게 뭘 잘못했나?” 소련은 이 초전(初戰)의 실수를 수천만명의 목숨과 눈물로 갚아야 했단다.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왼쪽 사진 가운데)과 이승만 대통령(오른쪽).
우리에게도 이런 악몽이 낯설지 않지.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의 시작을 보자꾸나. 흔히들 새벽 4시에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일제히 시작됐다고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야. 이미 새벽 3시경에 인민군은 오늘날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인 강릉 근처 정동진에 기습 상륙해서 국군의 뒤를 찌르려 들었으니까 말이야.

강릉에서 옹진반도까지(당시는 황해도 옹진반도가 우리 땅이었다) 인민군의 총공세가 펼쳐지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국군 수뇌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우선 코끼리라는 별명을 지녔던 거구의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전날 육군 장교클럽 오픈을 기념한 미군 군사고문단과의 술자리 끝에 지쳐서 자고 있었어. 새벽 2시를 넘어 귀가했으니 거의 인사불성 수준으로 코를 골고 있었을 거야. 전쟁 발발을 확인한 정보과장 김종필, 국무총리를 여러 번 지낸 그 김종필은 작전국으로 달려가서 비상을 걸어야 한다고 외쳤지만 작전국 일직 장교의 대답은 간단했어. “저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당연히 권한은 꿈나라를 질주하고 있던 참모총장에게 있었지.

이미 총장 집에는 아우성치는 전화가 걸려와 있었어. 전방 연대장의 전화였지. 하지만 술 취한 총장은 “어차피 38선에서 노상 있는 분쟁일 것”이라면서 눈을 뜨려 하질 않았어. 전화를 수없이 돌려도 총장과 연결되지 않자 육군본부의 장교가 직접 발바닥에 불이 나게 달려왔고 그제야 채병덕은 꿈나라에서 벗어나게 돼. “전군 비상.” 그러나 비상도 쉽게 걸리지 않았어.

ⓒ시사IN 조남진11월16일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 행적 조사를 촉구했다.
작전국 책임자 작전국장은 장창국 대령이었다. 그런데 이사 간 지 얼마 안 된 그의 집에는 전화가 없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어. 헌병 지프차가 출동해서 장창국 대령의 집 근처로 추정되는 곳에서 사이렌을 울리며 방송을 해댔다. “장창국 작전국장님 비상입니다.” 이런 난리통에 채병덕 참모총장도 다급해져서 국방부 장관 신성모에게 전화를 걸었지. 전화를 받은 건 국방부 장관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 “장관님 당장 바꾸라.” 채 총장의 급박한 호출에 대한 신동우 중령의 대답은 길이길이 역사에 기억될 거야.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이 영국 신사 국방부 장관을 만나기 위해 그 다급한 순간에 코끼리 채병덕은 쿵쾅거리며 직접 달려가야 했단다.

작전국장 장창국은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었어. 하도 헌병들이 사이렌을 울려서 무슨 일인가 나가보니 자신을 찾고 있는 게 아니겠니. 기절초풍하여 그 지프차에 올라타고 내달려서 육군본부에 도착한 게 오전 10시. 인민군이 공격을 시작한 지 7시간이 지난 뒤였어. 비슷한 시각 신성모 국방부 장관 역시 대통령 관저에 도착했어.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자리에 없었다. “경회루에 낚시 가셨습니다.” 다시 경복궁으로 뛰어가서 보고한 게 오전 10시30분이었어.

전쟁의 첫날 7시간은 그렇게 한심하게 지나갔다.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데만 7시간이 걸렸다. “전쟁이 나면 아침은 개성,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던 국군 수뇌부의 장담과는 달리 국군은 준비가 부족했고 아무리 포를 쏘아도 돌파해오는 인민군 탱크 앞에서 공황 상태에 빠져야 했지.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국군 수뇌부도 전쟁이 임박했다는 모든 징후를 물리쳤어. 인민군이 남쪽으로 귀순해와서 대군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준 것 말고도 많은 조짐이 있었지만, 국군 수뇌부는 방심했고 새벽까지 파티를 벌였으며 참모총장은 코를 골았고 작전국장의 집에는 비상 핫라인 전화 하나 없었다. 국방부 장관은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는 영국 신사도를 과시했지. 그 와중에 국군은 무너졌고 사흘 만에 서울을 잃어.

재난을 맞은 국가 지도부의 부실한 대응은 그 자체로 지진으로 치면 ‘강도 8’의 대재앙으로 변하기 십상이야. 하지만 중요한 건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잘했으며 또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처절한 복기가 이뤄져야 똑같은 재앙을 면한다는 사실일 거야. 미국에서 9·11 사태가 일어났을 때 초등학교에 있던 부시 대통령의 대응을 분 단위로 분석하고 공개한 이유란다. 그래서 아빠는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세월호 침몰 이후 대통령의 7시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보고를 받았다는데 기계적인 지시 몇 마디뿐

사실 대통령이 제대로 사태에 대응했다고 해도 세월호 사태의 규모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단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에 죄책감을 지녀야 하며 실패 이유를 찾는 데 눈에 불을 켜야 해. 그게 나라이고, 그 나라의 지도자는 곧 대통령이란다. 그러나 이 나라의 대통령은 모든 국민이 당일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생하게 떠올리는 그날, 2014년 4월16일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어. 수십 차례 보고를 받았다는데 기계적인 지시 몇 마디가 다였고 그 외 어떤 대처를 했는지는 묵묵부답인 가운데 아이들이 배 안에 갇혔음을 5000만 국민 가운데 가장 늦게 알아차린, 어처구니없는 비극의 장본인이 됐단다. 그래 놓고 믿어달라고 한다.  마치 스탈린의 심복 베리야가 “우리는 독일이 침공하지 않으리라던 현명한 당신의 예언을 기억합니다”라고 한 것처럼 “우리 대통령을 믿어달라”고 우기기만 하는구나. 그리고 그날 있었던 모든 혼란의 원흉을 ‘언론의 오보’로 몰아붙이는구나. 이런 식이라면 1950년 6월25일의 악몽 가운데 있었던 채병덕은 자신의 책임을 전날의 파티 주최자에게 돌릴 수 있고, 신성모는 신사도를 깨고 일요일에 남침한 북한을 욕할 뿐이며, 작전국장 장창국은 자기 집에 전화 하나 가설 안 한 통신병을 두들겨 팰 수 있을 거야. 이런 무책임한 나라가 나라일 수 있을까? 이런 어이없는 지도자가 지도자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번 주말에도 아빠는 광화문광장으로 간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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