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정치가로 변신하기 전 박근혜 대통령의 공식 직함은 수필가였다. 1993년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하 〈평범한〉)을 시작으로 〈내 마음의 여정〉(이하 〈내 마음의〉·1995),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이하 〈결국〉·1998),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이하 〈고난을〉·1998) 등 여러 권의 수필·일기집을 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부터 1989년 잡지·방송 인터뷰 등으로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내기 전까지, 박 대통령이 20대 후반~30대 후반에 쓴 글을 모은 책들이다.

박 대통령은 스스로도 수필가임을 자각했다. 1994년 한국문인협회에 수필분과 회원으로 가입했다. 훗날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던 2009년 7월에는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신분으로 월간 〈한국수필〉과 인터뷰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말했다. “제가 수필을 쓰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면 되나요? 구름이 저쪽에서 올 때면 비를 뿌리고 가야지 그냥 가면 안 된다는 것….”(하략이 아니라 여기에서 문장이 끝난다.)
 

ⓒ시사IN 조남진박근혜 대통령이 1990년대에 쓴 수필집.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수필가라는 사실을 여러 번 상기시키며 본인 글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 5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민관합동 규제개혁점검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수필가이기도 한데 수필 제목 중 하나가 ‘꽃구경을 가는 이유’이다. 꽃구경을 가는 이유는 그 꽃이 잠시 피지 영원하게 피지 않기 때문이다. 규제 혁신도 골든타임이란 게 있어서 내년에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2007년 펴낸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이하 〈절망은〉) 163쪽에 따르면 박 대통령에게 그 수필들은 ‘지금도 인생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더구나 이 글들은 ‘박근혜 게이트’가 터진 지금 많은 국민이 궁금해할 수밖에 없는 박 대통령 ‘칩거의 시절’ 당시 생각을 기록한 거의 유일한 기록물이다. 박 대통령의 깊고도 오묘한 정신세계를 이해하기에 좋은 지침서가 될 만한 그의 수필 속 문장들을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하늘의 뜻:깨끗한 영혼으로 기도하면 극락에 갈지어다

박 대통령은 운명론자다. “예언이 있다는 것. 또 그것대로 일이 이루어진 예들을 볼 때 역사와 인간의 운명도 모두 다 천명에 따라 각본에 따라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평범한〉 93쪽) 천명, 즉 ‘하늘의 뜻’에 대한 설명은 박 대통령 수필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뜻은 하늘의 큰 섭리 안에 자기를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중심이 되는 생이 아니고 하늘이 중심이 되어 사는 삶이다.”(〈평범한〉 183쪽) “하늘이 중심이 되고, 하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곳에서 펴시는 섭리 안에서 비로소 자신을 본다.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 사명, 운명은 우주같이 광활한 세계에서 한 부분일 뿐이다.”(〈평범한〉 184쪽)
 

2009년 92회 박정희 탄신제에서 술을 올리는 박근혜 대통령.

불교·기독교·천도교의 교리를 섞은 영세교 교주로 활동했다는 최태민씨와 그 딸과의 관계가 입길에 오르는 이때, 박 대통령 수필 속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천국’ ‘극락’ ‘하늘’ ‘기도’와 같은 단어들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어디가 극락인가? …마음 한번 돌려 부처가 되듯이 인류가 마음을 돌리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요, 하늘 나라가 임하신 곳이 되는 것이다.”(〈결국〉 105쪽), “하늘은 모든 것을 보고 또 알고 계시니 그 앞에서 거짓이란 있을 수 없다. …위대한 기도의 힘은 결국 지극히 깨끗한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즉, 그러한 마음에게만 하늘은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결국〉 115쪽)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자주 입에 올려 화제가 된 ‘영혼’이라는 단어도 눈에 띈다. “우리의 영혼이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죽음과 동시에 우리 육체를 떠나간다고 하지만, 또 그 영혼은 다른 몸에 의탁하여 이 세상을 다시 오고 가고 한다지만, 저승에 아무리 좋은 곳이 있다 해도 우리의 영혼을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답게 갈고 닦을 수 있는, 또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은 오직 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내 마음의〉 26쪽)

박근혜 문체:수필집도 ‘번역기’가 필요해

박 대통령의 발언은 그 뜻풀이가 어렵기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누리꾼들이 ‘박근혜 번역기’를 고안해냈을까. 이를테면 이런 발언이다.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될 것은 이것이다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걸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2015년 5월12일 국무회의)

이런 어투는 박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한 뒤 펴낸 책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2000년 박 대통령 이름으로 나온  회고집 〈나의 어머니 육영수〉나 2007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자서전 〈절망은〉의 문체는 매우 간결하고 명료하다(정치인 자서전은 전문 작가가 대필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대통령 박근혜의 어투는 20여 년 전 수필집에 등장하는 문체와 꼭 닮았다. “우리에게 진정 소중한 것들이 그렇게 커다란 도움을 주면서도 겸손하게 아무 말 없이 우리에게 봉사할 때 우리는 때 늦지 않게 그 소중함을 인식함이 중요하다. 공부를 안 하면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깨끗한 자연환경이나 건강, 신용, 마음의 평화, 풍요로운 노년기 등은 노력 없이 그냥 주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은연중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결국〉 74쪽) “언행은 그림자와 같이 생각을 따르기 마련이라 모든 그릇됨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우리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데 한 생각이 방향을 잘못 잡음으로써 궤도를 벗어난 우주선같이 고달픈 방황은 시작된다.”(〈결국〉 130쪽)

‘선과 악’ ‘올바른’ ‘우주’ ‘평화’ ‘인류’ ‘인생’ ‘지혜’ ‘소명’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이 문장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도 오늘날 박 대통령의 언어와 겹친다.

인간 이분법:선인이거나 악인이거나

박 대통령의 수필에는 사람 또한 매우 추상적으로 등장한다(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만 예외다. 36쪽 상자 기사 참조). 그녀의 글 속에서 사람들은 실명 혹의 익명의 특정 인물로 나타나는 대신 어떤 카테고리 아래에서 덩어리로 묶인다. 대표적인 덩어리가 ‘선인’과 ‘악인’, 또 ‘배신자’와 ‘고마운 사람’이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광고 문구도 있듯이 이 점 하나를 잘 찍느냐 잘못 찍느냐에 따라 영원히 선인이 되기도 하고 악인이 되기도 한다.”(〈결국〉 52쪽) “저것은 산이고 저것은 강이며 이것은 감나무요 또 이것은 대추나무라면, 저이는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이요, 저이는 나를 어떻게 해서든지 괴롭히려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다.”(〈결국〉 26쪽)

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내가 어려웠던 시절에 도와주고 친절했던 사람”(〈결국〉 23쪽)이다. 반면 싫어하는 인간 부류는 “몰상식한 행동, 배은망덕, 소신 없는 짓들을 하고도 전혀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인간들”(〈결국〉 157쪽) “어수룩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고, 뒤로는 음모를 꾸미고 음흉했던 사람”(〈평범한〉 11쪽)이다. 다만 “하는 일 하나하나가 경우에 안 맞고 돈을 보면 공사(公私)의 구별이 전혀 없어져버린 그녀를 보면 결국 아무런 일도 맡길 수 없게 스스로가 만드는구나 하고 느껴진다”(〈평범한〉 41쪽)에서의 ‘그녀’는 특정된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필가 박근혜’의 면모는 그간 묻혀 있다가 2013년 한 문학평론가에 의해 한 차례 조명되었다. 2013년 9월호 〈현대문학〉에 실린 이태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의 평론 ‘바른 것이 지혜이다-박근혜 수필 세계’에 의해서다. 이 교수는 박 대통령의 수필에 대해 “부조리한 삶의 현실과 죽음에 관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코드를 탐색해서 읽어내는 인문학적인 지적 작업에 깊이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성이 있는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라며 극찬했다. 또 “모럴리스트인 몽테뉴와 베이컨 수필의 전통을 잇는 수신(修身)에 관한 에세이”인 박근혜의 수필은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라고도 평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는 이 교수의 평론과 박근혜의 수필을 비판적으로 언급한 단락을 다음 호 〈현대문학〉 원고에 담았다. 하지만 이 원고는 그대로 실리지 못했다. 편집부가 ‘정치적인 내용’이라며 수정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당시 삭제된 단락이다. “그이(박근혜)에게 문학은 삶을 무시한 대가로 얻어낸 ‘영감’―혹은 ‘사로잡힘’, 즉 도취에 가까운 것―으로 일구어낼 수 있는 영역인 듯하다. 여기에서 그이가 무시한 ‘삶’이란 그이 자신의 삶을 이르는 게 아니라 그이가 책임을 회피하려 들었던 숱한 얼굴들의 구체적인 삶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한 개인의 슬픔에 매몰되어 그 특수성만 강조하던 권력자가 다른 어떤 삶들을 외면하여왔는지를, 그리고 권력자와 그이를 예찬한 어떤 이의 문장 속에서 집요하게 외치던 ‘삶’이란 실은 특수한 몇몇의 가진 자들만의 입장만을 지시하고 있음을.”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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