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 (만화가)

서양의 예술대학 교수들이 한국의 미대 입시생들이 그리는 수채화를 보고 기겁했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수채화는 재료의 특성상 한번 붓을 대면 수정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유화보다 어려운 그림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한국의 미대 입시생들은 그렇게 어려운 재료를 이용해, 불과 4시간 만에 2절 전지 사이즈의 정물화를 뚝딱 그려낸다. 그리고 서양의 대학교수들은 입시생들의 그림이 대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란다.

시대에 뒤떨어진 한국 미대의 입시제도가 미대 입시생들을 ‘수채화 마스터’로 만들었다. 지금은 실기 유형이 제법 다양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화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물수채화를 그려야 했다. 역설적이지만 4시간이라는 촉박한 시험시간 내에 종이를 밀도 있게 채우기 위해서는 수채화 기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이 스킬을 익히기 위해 학생들은 하루 4시간에서 12시간까지 입시 미술학원을 다니며 ‘그림 그리는 기계’가 된다.

〈애제자〉
김영조 그림
레진코믹스 연재
이 입시 미술의 시스템에 만화·애니메이션 대학 입시가 포함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는 약 20개의 만화·애니메이션 대학이 있는데, 이들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칸만화’ 또는 ‘상황표현’으로 실기시험을 치러야 한다. 만화·애니메이션과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은 진학을 위해 원치 않는 입시 미술을 해야 한다. 대학에 진학해도 모두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학자금 대출로 빚을 지고, 박봉과 중노동에 시달리는 월급쟁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만화·애니메이션과 입시생들의 애환에 대해 이야기하는 만화가 있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면 사회 고발물이 되겠지만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학원물의 포맷인 ‘성장’과 ‘짝사랑’을 두 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김영조 작가가 그린 〈애제자〉이다.

〈애제자〉의 주인공은 반지하 단칸방에서 자취하며 팍팍한 서울살이를 하는 만화·애니메이션과 졸업생이다. 그의 낙은 단골 카페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을 바라보며 혼자 마음속으로 사랑을 키워가는 일이다. 그런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하기 시작한 입시 미술학원에서 그는 짝사랑하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만화·애니메이션과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이었다. 주인공은 매일 그녀를 가르치지만 진짜 속마음은 깊이 감춰야 하는 괴로운 상황에 직면한다.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녀를 연정의 대상을 삼는 마음은 병적인 측면이 있다. 주인공의 경우 처음에는 그녀가 학생인 줄 몰랐고 그녀의 정체를 안 다음에는 철저히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있으니 도덕적으로 비난하긴 어렵지만, 그의 사랑은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돈다. 이 사태가 그 혼자만의 잘못인가. 청춘을 입시와 학점·취업으로 얽매고, 졸업한 뒤에도 제 몸 누일 방 한 칸 구하기 어려워, 이성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제 감정이 뭔지도 모르게 만든 건 이 사회 아닌가.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이 만화에는 또 다른 짝사랑이 등장한다. 만화를 좋아하지만 입시는 싫고, 대학은 가야 하기에 설렁설렁 학원을 다니던 여학생이 있다. 그런데 새로 온 강사가 자신이 그린 만화의 장점을 알아보고 칭찬하자, 그녀의 마음속에 환한 꽃이 핀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고, 그림 실력 또한 나날이 발전한다. 자신이 연모하는 그 남자와는 다르게, 그녀는 사랑하는 만큼 성장한다.   

김영조 작가는 수채화 기법으로 이 만화를 그렸다. 수작업은 아니고 디지털 작화 기법으로 그린 만화이지만 수채화 특유의 맑게 물이 번지는 느낌이 살아 있다. 수채화는 입시 미술뿐만 아니라 청춘물에도 잘 어울린다. 현실에 짓눌린 청춘은 청춘이 아닌가. 대학을 가기 위해 그린 그림은 그림이 아닌가.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기자명 박해성 (만화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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