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제! 제4차 범국민행동의 본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서울 광화문광장에 울려 퍼지고 그 뒤를 이어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왜 내 눈 앞에 나타나~ 왜 네가 자꾸 나타나~” 김범수가 부른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주제가 ‘나타나’였다. 차움병원 VIP 시설을 이용할 때 박근혜 대통령이 사용한 가명이 ‘길라임’이었다는 뉴스를 접한 이들이 신들린 듯 관련 농담을 했던 한 주의 마무리다운 선곡이었달까. 광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로 낄낄 웃음소리가 번져 나갔다. 각종 인터넷 서비스 등으로 범국민행동의 생중계를 지켜보던 이들도 이 선곡에 함께 키득거렸으리라.

하지만 온 국민이 웃는 그 순간에도, 박근혜 대통령을 제외하고라도 최소한 한 명은 웃지 못했을 것이다. 경력 7년차, 스물아홉 살이 되도록 서울 창신동 절벽 끝 월세 30만원짜리 방을 벗어나지 못했던 액션 배우, 길라임씨 말이다.

ⓒ이우일그림
라임씨의 삶은 영 물기 없이 퍽퍽했다. 소방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고등학교 1학년인 자신을 혼자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를 따라서 소방공무원이 되겠다던 그녀의 꿈도 거기에서 멈췄다. 나라에서 주는 돈에 기대 살았다는 말과 달리 라임씨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 온몸으로 삶의 조건을 돌파하며 살았다. 누구처럼 6억원을 챙겨줄 ‘오빠’ 같은 건 없었으니 별 도리가 없었다. 밥집 홀 서빙 업무 6개월, PC방 카운터 3개월, 패스트푸드점 주방 5개월, 보조출연자 3개월, 세차 2개월, 제과업체 봉투 제조 3개월, 스키장 제설작업 4개월 따위로 도배가 되어 있는 그녀의 이력서는 험난하기 짝이 없다. 어릴 적 익혀둔 태권도와 합기도, 검도와 유도의 재주를 살려 액션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했지만, 라임씨의 꿈을 인정하고 응원해주는 이는 종수와 그가 이끄는 액션스쿨 스태프들뿐이다. 현장에선 “그래 봤자 지가 스타인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남 대역하는 스턴트잖아”라며 대놓고 홀대하는 이들의 무시를 감내해야 했다.

그래도 제 손으로 제 삶을 개척한다는 자부심은 라임씨가 가진 몇 안 되는 재산 중 하나였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아무 죄 없이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를 연거푸 외치면서도 그 말 한마디로 다시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목숨을 걸고 몸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액션 배우의 삶을 자부심 하나로 버텨낸 라임씨는 자신이 촬영 현장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온갖 부조리를 이 악물고 견뎌냈다. 훗날 마침내 자신이 책임을 질 만한 자리에 올라갔을 때는 후배들이 그런 부조리 때문에 다치지 않도록 그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문분홍 여사와의 첫 만남에서 돈으로 사람 업신여기는 부유층 특유의 선민의식에 정면으로 “삼신할머니 랜덤 덕에 부모 잘 만나 세상 편하게 산 남자, 저랑 놀 주제 못 됩니다”라고 맞받아쳤다. 그저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라임씨의 순도 높은 진심이었다. 돈에 굴하지 않고, 위세에 주눅 들지 않고, 자기가 정직하게 제 힘으로 일해 꿈을 향해 간다는 자긍 말이다.

‘삼신할머니 랜덤 덕에’ 대통령인 아버지를 만난 ‘그쪽’

누구나 현실의 고단함을 잊고 잠시나마 환상을 누려보려고 드라마를 본다. 정치인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박근혜 대통령도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보았을 수도 있다. 그것이 비난받을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의혹은 온갖 법망의 허점을 피해 영리병원 사업을 하고 있는 업체를 연회비도 안 내고 비밀리에 이용하며 그 대가로 훗날 해당 병원에 온갖 행정적인 편의를 봐줬느냐 여부이다. 그런 의혹투성이 거래에 감히 라임씨의 이름을 빌려 썼다는 것이 잘못이다(청와대는 길라임은 병원 간호사가 만든 가명이라고 해명했다).

라임씨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그걸 이유로 자신을 동정해달라 말해본 적 없고, 특혜와 반칙을 일삼았던 누구와는 달리 우직할 정도로 바른 길만 걸으며 세상을 헤쳐 나간 사람이다. ‘삼신할머니 랜덤 덕에’ 대통령인 아버지를 만나 그 후광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은 라임씨의 이름을 빌려 쓸 주제가 못 된다. 2011년 11월13일 SBS를 통해 처음 전파를 탄 〈시크릿 가든〉에서, 우리는 이 어메이징한 여자를 만났다. 길라임은 죄가 없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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