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장관이 사임했다. 법무부 부장관도 사임했다. 대통령의 지시는 막무가내였다. “특검을 해임시켜라.”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은 대통령이 ‘그놈의 하버드 교수’라고 부르던 아치볼드 콕스 특검 해임에 반대했다. 사표를 던졌다. 윌리엄 러클스하우스 법무부 부장관도 특검 해임에 반대하며 물러났다. 결국 법무차관이 콕스 특검을 해임했다. 1973년 10월20일 닉슨 대통령은 ‘토요일 밤의 학살’을 자행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닉슨 대통령의 전철을 밟고 있다. 닉슨은 탄핵 투표 직전 스스로 사임했지만 고분고분 물러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처럼 마지막까지 버텼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맡은 시리카 판사는 1973년 3월23일 피고인 가운데 한 명으로 전직 CIA 요원이었던 매코드의 옥중 편지를 법정에서 공개했다. 위증과 입막음을 위한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는 폭로였다. 이 편지는 최순실의 태블릿 PC와 비슷했다. 백악관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원 위원회(위원장을 맡은 민주당 상원의원 샘 어빈의 이름을 따서 어빈 위원회라 불린다)는 84일간 34명의 증언을 들었다. 모두 텔레비전으로 생방송되었다. 이 어빈 위원회에서 ‘스모킹 건’이 나왔다. 닉슨의 보좌관 알렉산더 버터필드는 어빈 위원회 조사에서 백악관의 녹음 장치를 진술했다. 닉슨을 잡은 것은 닉슨 자신의 발언을 녹음한 테이프였다. ‘토요일 밤의 학살’ 이후 특검을 맡은 자워스키는 전임 콕스의 뒤를 이어 닉슨 대통령에게 녹음테이프 제출을 요청했다. 연방대법원 대법관도 8대0으로 닉슨 대통령에게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고 판결했다. 〈워싱턴 포스트〉 소속 밥 우드워드·칼 번스타인 기자의 열정, 시리카 판사의 원칙, 상원 특별위원회의 초당적 조사, 특검의 끈질긴 수사가 어우러져 닉슨을 끌어내린 것이다. 백악관 지글러 대변인의 표현을 빌리면 “삼류 좀도둑 사건”은 대통령 낙마로 끝났다.

혼란은 없었다. 미국 사회는 대통령을 끌어내린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언론인 스스로 ‘워치독(감시견)’으로 거듭나려 했다. ‘랫퍼킹(rat-fucking)’이라 불린 ‘닉슨식 공작 정치’가 줄어들었다. FBI나 CIA 등 정보기구에 대한 민주적 견제장치가 의회에 마련되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닉슨의 길을 걸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탄핵이라는 1막이 끝난 뒤 이어질 2막이 더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의 사과부터 받아내야 한다. 언론인 출신 정 대변인은 박근혜 게이트 초기 “언급할 만한 일고의 가치가 없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언론 보도를 폄훼했다(〈시사IN〉은 이번 호부터 ‘최순실 게이트’를 ‘박근혜 게이트’로 명명하기로 했다). 지글러 대변인은 나중에 “〈워싱턴 포스트〉에 사과하며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기자에게 사과한다. 우리가 틀렸다”라며 공식 사과했다. 정연국 대변인의 사과가 새로운 권·언 관계 정립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그의 사과를 기다린다.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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