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수 작가는 세 번째 작품 〈펀치〉에서는 다시 선이 이기는 세상을 그린다. 그악스럽게 살아온 주인공 박정환 검사(김래원)는 어쨌거나 마음을 바꿔 자신을 희생하고 가족들을 살려냈다. 부패와 위선으로 정환의 인생을 망쳐온 장본인들이자 권력욕의 노예인 윤지숙 국무총리(최명길)와 이태준 검찰총장(조재현)은 감옥에 갔다. 자, 이것은 희망인가?
〈추적자 더 체이서〉의 갈등 구도는 “프로타고니스트:개천 주민(백홍석)↔안타고니스트:개천 용(강동윤)↔금수저(한오그룹)”였다. 개천 주민들은 용을 끌어내려 징벌하고 금수저에도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황금의 제국〉의 갈등 구도는 “프로타고니스트:개천 용(장태주)↔안타고니스트:금수저(한오그룹)”로 축소되며, 시민들의 역할은 대폭 줄어들거나 포커스 아웃이 된다. 그리고 〈펀치〉에 와서는 마침내 개천의 주민들이 아예 시야에서 사라진다. 검찰과 재벌, 정치권이 상상을 초월한 욕망을 드러내고 싸우는 동안, 옳은 방법으로 정의를 구현해보겠다는 소신을 지키려던 신하경 검사(김아중)는 윤지숙에게 뒤통수나 맞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정도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정환이 주도하는 온갖 사술과 편법은 목적이 정당하기에 응원의 대상이 된다. 검사조차 사술에 걸리면 목숨을 잃을 판인데, 평범한 시민들이 설 자리가 있을 리 없다.
정치적 냉소는 아래에서부터 주도하는 변화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방식으로 심화된다. 시민사회, 누리꾼, 평범한 이웃들의 참여 같은 이야기는 점점 극에서 자리를 비우고, 일반 시민들은 철저히 배제된 채 엘리트들끼리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벌이는 싸움이 그려진다. 급기야 악과 싸워 이길 수만 있다면 선인이 아니어도 상관없고 정도를 벗어나도 괜찮다는 이상한 승리가 기념된다. 시청자들은 윤지숙과 이태준 사이의 파워게임 결과에 따라 노골적으로 위계관계가 휙휙 바뀌는 모습을 보며 권력의 생리를 비웃는다. 하지만 정작 그걸 비웃는 시청자의 절대다수가 그 권력 구조 안에는 끼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선 다들 알면서도 언급을 꺼린다. 작가는 더 이상 평범한 대중에게서 시작하는 정치 변혁 같은 걸 믿지 않고, 시청자 또한 자신들이 주체로 호명되는 자리를 피한다. 위에 있는 놈들은 그놈이 다 그놈(박정환·이태준·윤지숙)이지만, 그래도 뭔가를 바꿀 수 있는 힘도 위에 있는 놈들에게나 있다는 식의 자포자기다.
‘나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의 싸움으로
이기는 싸움을 하는 것이 간절해진 이들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고, 그 궁리는 ‘이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식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열망은 ‘나의 싸움’에서 ‘나’를 지우고 ‘이길 수 있는 사람’을 넣는 극단적인 대리전이거나,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좋으니 이기면 그만이라는 지점까지 뻗어 나갔다. 극단적인 예로, 2016년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당시 대표는 당의 위기를 타개하고 계파 갈등을 수습해 총선을 진행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김종인을 ‘모셔’왔다. 박근혜 정부 탄생에 지대한 기여를 한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당의 정체성이나 색깔과는 그 결을 달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지만,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던 사람들 중 적잖은 수가 이 결정에 열광했다. 두 차례 수권을 했고 세 자릿수의 의원을 보유한 정당이 자력으로 인물을 키우고 적소에 배치하는 일을 못해 적진에서 사람을 데려오느냐는 자괴감을 토로하는 이보다, 어쨌거나 이길 줄 아는 사람을 데려왔다는 기쁨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이러한 냉소의 흐름은 비단 브라운관 안에만 반영된 것은 아니다. 한때 ‘조폭 영화’와 동의어였던 ‘한국형 누아르’ 장르는 어느 순간부터 비리나 부정부패와 싸우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다음 회에는 지난 몇 년간 한국 극장가를 수놓은 어떤 영화들, 특출 난 검사와 양심 있는 기자와 포기를 모르는 경찰이 나와서는 끈적한 구악을 시원하게 소탕하는 종류의 ‘사이다’ 영화들의 범람을 함께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