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에 한동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정유라’ 이름 석 자는 아이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주었다. 실시간으로 뉴스를 접하며 학생들은 어느 날은 맥이 빠졌고 어느 날은 정신없이 욕을 했다. “우린 학원 다니며 이 고생을 하는데 유라는 좋겠다” “나도 집회 나가고 싶은데 학원을 빠질 수는 없고”.

수많은 아이들이 무력감을 드러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지난 11월12일 기어이 토요일 수업에 빠졌다. 삼삼오오 거리로 나선 것이다.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는 기회였다. 무기력하게 살지 않을 기회였다. 학생들 관심의 시작은 입시 비리였지만 결론은 확장되었다. SNS를 끼고 사는 학생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모았다. 사실을 통합하고, 친구와 소통하고, 모르는 것을 물어가며 최·박 게이트의 핵심을 꿰뚫었다. “거짓말하지 않고, 자기 일 잘하고, 진실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대통령은 절대 내려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계속 내려오라고 할 거예요”. 집회에 나가지 못한 학생도 다음 선거 때는 자신이 한 표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다.

ⓒ김보경 그림
하지만 몇몇 어른들은 학생의 판단을 믿지 못했다. 어떤 학교는 집회에 참여했다가 발각되면 처벌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실제로 징계를 내렸다가 철회한 학교도 있다. 아이들은 “학생이 왜 정치 활동을 하느냐. 본분에 충실해라” “니들이 뭘 알겠니” 따위 말을 들었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대다수 어른들은 청소년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고, 학교와 학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충실히 따라가라 요구해왔다. 학생에게 주어진 역할을 넘어서면 ‘탈선’ ‘비행’ ‘낙오’ ‘부적응’ 따위 낙인을 찍었다. 청소년의 목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1999년 중·고등학생을 포함한 56명이 사망한 인천 인현동 화재 사건 때도 학생들은 목소리를 높였지만 묵살당했다.

아이들은 사회에 계속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러나 변화 역시 학교에서 시작된다. 강원도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시국선언에 교사가 화답하는 대자보를 내걸었다. “여러분이 제자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여러분의 선생님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일주일 후 이 학교 졸업생들도 가세했다. 선배들은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된 후배들을 독려하며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겠다고 글을 남겼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는 교내 게시판과 복도, 학교의 등나무에 학생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오언절구 한시를 짓고, ‘순실고 시간표’를 만들면서 재치 있게 시국을 풍자했다. 한 고등학교 교사는 현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모둠활동 수업을 진행하며 학생이 스스로 사회에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했다. 입시 수험생 커뮤니티 ‘오르비’에도 시국선언문이 올라왔다. 한 수험생은 “고등학교 교과서만으로도 이 나라가, 이 사태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공부하는 이유이니까요”라고 썼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닫게 되는 현실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 학교나 학원 교사의 구실은 중요하다. 학생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의견이 어른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따라 이들이 품을 사회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그들의 질문을 미성숙하다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교육을 확장시켜야 한다. 10대들은 기성세대가 하나둘 노란 리본을 뗄 때 그것을 계속 달며 세월호를 가슴에 품은 세대다. 경북 성주군의 학생들은 사드 배치에 대해 물었고, 이번에는 전국의 학생들이 대통령의 부정에 대해 묻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 계속 질문을 던질 것이다.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 모인 청소년들은 이렇게 호소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측근들에게 제공한 특혜는 우리 청소년들의 노력과 이 길에서 죽어간 수많은 친구들의 고통과 눈물을 모독하고 짓밟았다.” 학생들이 이끌어갈 미래에 ‘회의’와 ‘체념’이 먼저 싹트지 않도록, 어른들이 답을 내놓아야 한다.

기자명 해달 (필명·대입 학원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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