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는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것들이 송두리째 바뀌던 순간의 연속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드골은 68세대의 퇴진 압력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지구에 묶여 있던 인류는 처음으로 지구가 아닌 다른 천체에 발을 디뎠다. 호찌민이 세상을 떠났고, 닉슨은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며 베트남에서 단계적 철군을 시작했다. 전공투 학생들은 도쿄 대학 강당을 점거했고,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주민들은 ‘스톤월 인’에 모여 경찰의 성 소수자 박해에 맞섰으며, 히피들은 베델 평원에 모여서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열었다. 모든 게 바뀌던 1969년, 미국 PBS에서도 비범한 텔레비전 쇼가 방영을 시작했다.

프로그래머 조앤 간츠 쿠니와 교육심리학자 로이드 모리셋이 3년간 준비한 쇼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이전 텔레비전 쇼들과는 달랐다. 숫자를 어떻게 세는가부터 이를 닦는 것은 어떻게 하고 알파벳은 어떻게 익히는가를 알려주는 이 새로운 쇼의 타깃 시청자는 미취학 아동이었다. 인간 출연자와 인형이 한 화면에 함께 등장해 대화하는, 전에는 볼 수 없던 형식이었다. 쇼의 무대는 뉴욕 맨해튼 어딘가에 위치한 거리였는데, 그곳에서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온갖 인종의 사람들이 위계도 차별도 없이 어울려 살았다. 쓰레기통에서 살아가는 불평꾼과 아파트 반지하에서 동거 중인 소년들, 무슨 일을 해도 매번 실수를 저지르는 털북숭이 괴물과, 8피트2인치(249㎝)의 거구로 날개를 퍼덕이며 춤추고 노래하기 좋아하는 노란 새가 사는 거리의 이름은 참깨 거리 123번지였다. 전 세계 아동교육 프로그램의 원조 〈세서미 스트리트〉가 그렇게 시작됐다.


〈세서미 스트리트〉는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1960년대에 흑인은 물론 히스패닉과 아시아계가 공존하는 거리를 그렸다. 애초에 쇼를 만든 게 불우한 환경에 처한 소수자 집단의 아이들에게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TV의 중독적인 힘을 빌려보자는 게 목적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 어떤 사회적·경제적·인종적 배경을 가진 아이라 해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자”라는 목표 의식은 다양한 존재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이상향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이상향이 환상의 나라가 아니라 뉴욕 어딘가에 있는 골목이라는 설정은 아이들에게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한적한 교외에서 살아가는 부유한 계층의 아이들이 아니라, 성냥갑처럼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에서 가난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민자 가정의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쇼를 만든 것이다.

세계시민으로 자라는 법을 알려주는 어린이 프로그램

참깨 거리에서는 아무리 별난 존재여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병적으로 숫자를 세는 데 집착하는 카운트 백작이 민폐를 끼쳐도, 쿠키 몬스터가 쿠키를 먹겠다고 거리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도, 쓰레기통에 사는 오스카가 모든 사람들에게 험담을 퍼부어도, 무슨 일을 해도 망치고야 마는 그로버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해도, 참깨 거리의 주민들은 한숨을 쉬고 고단함을 토로할지언정 끝끝내 이들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는다. 참깨 거리 주민들은 태풍에 빅 버드의 둥지가 무너지면 힘을 합쳐 둥지를 재건하고, 주인이 누구인지도 정확하지 않은 개 바클리를 번갈아가며 돌본다. 〈세서미 스트리트〉를 통해 아이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며 함께 갈등을 풀어나가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배웠다.

아이들이 자라며 겪게 될 수많은 고난과 슬픔을 〈세서미 스트리트〉는 외면하지 않는다. 1982년 미스터 후퍼를 연기하던 배우 윌 리가 사망하자, 제작진은 아동심리학자의 조언을 받아 미스터 후퍼의 죽음을 다룸으로써 아이들에게 삶의 유한함을 가르쳤다. 2006년 시즌 37에 처음 등장한 애비 카다비는 이혼 가정의 자녀로 엄마와 아빠 사이를 오가며 생활하는 소녀이고,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나이지리아 판 〈세서미 스트리트〉에 2002년 첫선을 보인 캐릭터 카미는 에이즈를 유발하는 HIV 감염으로 부모를 잃고 자신도 HIV 양성인 소녀였다. 〈세서미 스트리트〉는 아이들에게 현실의 역경을 이겨내는 법을 가르치고 격려한다.

1969년 11월10일 첫 방영 이후 47년, 오늘도 이 ‘세상에서 제일 긴 거리’ 위에서는 전 세계 수많은 아이들이 뛰논다. 아이들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합심해 고난을 이겨내는 세계시민으로 자라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한국에서는 현재 EBS2에서 방영(매일 오전 10시) 중이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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