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닐(LP)을 샀다. 블루레이도 샀다. 책을 조금 샀는가 하면 새로 나온 만화책도 왕창 사버렸다. 못해봤던 게임들도 좀 샀다. 과연 나는 소비하는 인간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인가. 아무리 지름신이 내 운명이라고 하지만, 이러다가는 이삿짐센터 아저씨한테 미안해서라도 이사를 못 가지 않을까 싶다. 나뿐만이 아니다. 기실 우리 모두는 타고난 소비자다. 찾아보니, 인간의 소비 패턴을 진화론과 연결시킨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고 한다. 우리는 소비하다 죽을 것이다.

곰곰이 되새김질해봤다. 과연 어떤 지점이 나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것일까.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야기에 매혹되는 사람이다. 이야기가 있는 음악을 좋아하고, 스토리가 탄탄한 게임을 선호한다. 만화책 역시 단편보다는 최소 중편 이상의, 뭔가 명확하지만 매혹적인 서사를 지닌 작품을 사 모은다. 책도 마찬가지다. 소설보다는 사회과학 서적에 더 끌리고 그중에서도 〈나, 소시오패스〉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등 에세이처럼 쓴 사회과학 서적을 더 사랑한다.

ⓒYou Tube 갈무리올해 2집 정규 앨범을 낸 싱어송라이터 곽푸른하늘.

최근에 이런 음악을 만났다. 바로 곽푸른하늘의 정규 앨범 〈어제의 소설〉이다. 일단 어제의 ‘소설’이라. 자연스레 제목에서부터 우리는 이 앨범이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곽푸른하늘은 이미 인디 신에서는 평가가 끝난 싱어송라이터다.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화제를 모은 바 있는 그의 음악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경우는 어지간히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 말고는 거의 없을 거다. 무엇보다 2014년부터 자신이 만든 곡을 소개해온 그가 올해 발표한 2집 〈어제의 소설〉은 더 주목받아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다.

강하거나, 치열하거나, 무겁지 않아도

현악 세션과 정갈한 기타 연주가 전부인 ‘읽히지 않는 책’을 먼저 들어보기 바란다. 섬세하게 잘 조율된 포크 음악에 사람의 마음을 툭, 하고 떨어뜨리는 듯한 구절이 딱 하나만 더해지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일 텐데, ‘읽히지 않는 책’은 바로 이걸 해낸다. “나는 네가 쉬지 않는 공휴일”이라니, 곽푸른하늘은 화자의 마음 상태를 이렇게 뭔가 다르면서도 무릎을 탁 치게 하고, 종국에는 고개를 끄덕일 만한 표현으로 묘사할 줄 안다. 그의 재능이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902동 302호’ 역시 마찬가지다. 당신은 이별 후에 당사자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그것은 공간일 것이다. 공간 곳곳에 둘만의 시간과 정서가 배어 있기에,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다시 그 공간에 진입하는 순간 추억은 어쩔 수 없이 소환되게 마련이다. 이 곡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고는 목소리와 기타가 전부다. 기타 연주의 배음이 남기는 잔향을 배경으로 곽푸른하늘은 마치 아련한 수채화 같은 풍경 하나를 듣는 이들에게 보여준다. 음악을 포함한 대중 예술의 가장 주요한 기능 중 하나가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면, 이 곡이 지닌 이야기를 듣고 동질감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이런 것을 줄여 보통 ‘공감’이라고 부른다.

싱어송라이터 김목인이 이 음반에 대해 쓴 문장들 중 하나에 내 눈이 오래 머물렀다. “멈춰 서면 오래 들여다볼 수 있는 노래.” 곽푸른하늘의 앨범 〈어제의 소설〉은 이 표현처럼 가만히 응시하듯 들여다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곡들이 빼곡하다. 마치 독백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곽푸른하늘의 내밀한 감정선을 그렇게 곱씹다 보면, 작은 위로 하나 만나게 될 것이다.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의 대사 한 줄을 빌려와본다. “강하거나 치열하지도 않고, 무겁거나 가볍지도 않다. 하지만 마음에 남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부디 이 좋은 음반이 〈어제의 소설〉이라는 제목과는 반대로 앞으로도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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