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막말 때문에 실체가 가려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각종 혐오 발언을 걷어내면 거기에는 미국 대외정책과 관련된 하나의 지적 사조를 대변하는 색다른 인물의 모습이 드러난다. 바로 ‘대외 불개입주의(non-interventionalism)’ 또는 ‘고립주의’다. 미국의 저명한 평론가 찰스 크라우트해머는 4월28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트럼프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 미국 제일주의(America First)를 제창한 찰스 린드버그, 냉전 종식 후 일찍이 ‘미국이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절규한 평론가 패트릭 뷰캐넌, 공화당 대선 후보 중 하나였던 랜드 폴 상원의원으로 계보가 이어져온 고립주의자다”라고 단언했다.

트럼프의 캐치프레이즈라 할 수 있는 ‘미국 제일주의’부터 그렇다. 원래 이 구호는 찰스 린드버그가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린드버그가 결성한 ‘미국 제일주의위원회’는 히틀러의 횡포에 맞서려는 미국 정부의 발목을 붙잡다가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 지 5일 만에 해산됐다.

린드버그의 미국 제일주의 구호를 냉전 종식 후 되살려낸 인물이 바로 패트릭 뷰캐넌이다. 그는 닉슨·포드·레이건 대통령의 보좌관 내지 고문으로 활약하다 칼럼니스트로 전업해 명성을 떨쳐온 인물이다. 특히 그가 1991년 9월8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은 소련과의 냉전에 이어 걸프 전쟁에서까지 승리해 미국 주도의 ‘신세계질서(NWO)’에 도취해 있던 미국 사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왼쪽)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오른쪽)과 직접 협상을 원한다.

그는 이 칼럼에서 ‘미국 제일주의는 미국인 또는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만 해외 전장에 나간다는 건국 아버지들의 이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더 이상 무분별한 개입을 중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라고 주장했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그가 제시한 내용들은 트럼프가 이번 대선 과정에서 쏟아낸 대외정책 관련 발언들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 첫 번째 제언이 바로 한국에서 미국 지상군을 전면적으로 철수시키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본과의 안보 조약을 파기하고, 세 번째는 중국과 일본의 패권을 우려하는 동아시아의 비교적 작은 나라들이 미국 해군의 주둔을 원하면 대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로 모든 대외 원조를 중단하라고도 주장했다.

트럼프의 거의 모든 대외정책은 뷰캐넌의 칼럼이나 저서를 원전으로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는 뷰캐넌주의자라 할 수 있다. 뷰캐넌은 2002년 〈서방의 죽음〉과 2011년 〈초강대국의 자살〉이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좀 더 상세하게 피력했다. 그는 대영제국이 멸망한 것은 세계 문제에 개입했기 때문이라며, 미국이 대영제국과 같은 길을 걸으면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같은 지론에 따라 그는 부시 정권의 이라크 전쟁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극우 국가주의자로 분류되는 그가 진보 세력과 손잡고 이라크 전쟁 반대를 외친 것은 하나의 진풍경이었다. 또한 이런 점에서 뷰캐넌에서 트럼프로 이어지는 고립주의자들은 부시 정권 이래 민주당이나 공화당을 막론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미쳐온 네오콘과 구별되기도 한다.

네오콘이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해 미국의 대외 개입주의를 선도해온 유태인 중심 세력이라면 뷰캐넌으로 대변되는 고립주의자들은 미국 남부에 포진한 백인 기독교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공화당 내 티파티 그룹과 맥을 같이한다. 〈서방의 죽음〉에서 뷰캐넌이 주장하는 서방(the West)이 바로 백인 기독교도 사회를 의미한다. 유색인종의 이민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 백인 기독교 사회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불법 이민을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난해 대선 출마 일성으로 트럼프가 외친 멕시코 국경지대 장벽 설치는 뷰캐넌이 이미 2011년 저서에서 언급한 방안이기도 하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반대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주장하며 보호무역주의 노선을 걷겠다고 한 트럼프의 대외경제 노선 역시 자유무역에 피해의식을 가진 백인 기독교도의 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심지어 동맹에 대한 시각 역시 부분적으로는 인종주의에 기반한다. 한국이나 일본·중동의 유색인종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굳이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AP Photo

‘친구를 돕지 않을 뿐 아니라 적과 싸우지도 않는다.’ 고립주의자의 대외정책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미국이 굳이 한국과 일본, 유럽을 지키기 위해 돈을 쓸 이유가 없으니 미군이 필요하면 각국이 비용을 대라는 것이다. 또 중국·러시아와 미국이 굳이 적대관계를 맺을 이유도 없다. 크림반도 문제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는 중부 유럽 전선이나 아시아 국가들과 안보 및 경제 분야의 유대를 강화하는, 오바마의 아시아 회귀 전략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중국과의 대립 전선에서 극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대목들이다.

“핵전쟁 위험 있는 한반도에서 발을 빼야”

대선 기간에 트럼프는 “김정은과 햄버거 먹으며 대화하겠다”라고 말했다. 이 역시 즉흥적으로 나온 얘기가 아니다. 대북정책에 대한 뷰캐넌의 처방에 닿아 있다. 뷰캐넌은 2006년 10월19일자 ‘크리에티어닷컴’에 기고한 ‘부시 독트린은 끝?’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북한과 이란의 핵 개발을 자극했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1970년대 닉슨 대통령이 마오쩌둥에게 주었던 것을 원하고 있다”라며 북한과의 직접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북한이 모든 핵 프로그램을 공개하고 추가 핵 개발을 포기한다고 확고하게 보장하면, 그 대가로 북한과 외교관계 수립, 경제적 지원, 주한미군 철수를 담은 안보조약을 체결하라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 중에서 김정은과 직접 협상이라는 첫 단계를 대선 과정에서 극적인 방식으로 공개한 것이다. 뷰캐넌의 제안을 참고하면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이 한반도의 긴장 상태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뷰캐넌의 발상은 지난 1월 북한의 핵실험 직후에도 등장했다. 정치 매거진 〈아메리칸 컨서버티브〉에 기고한 ‘북한과 꼬인 동맹’이란 칼럼에서 그는 “북한의 수소탄 실험으로 골치 아픈 것은 중국의 시진핑이지 미국이 아니다. 차제에 미국은 핵전쟁 위험이 있는 한반도에서 발을 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죽은 정책에 비유하고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를 방어하도록 미국이 신 닉슨 독트린을 고려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뷰캐넌이나 트럼프의 고립주의 정책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진면목이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대외 불간섭주의로부터 출발했다.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 이임사에서 “미국은 유럽의 어떠한 나라와도 관계를 맺으면 안 되며 유럽의 분쟁에 휘말리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고립주의 정책의 시초이다. 그 뒤 고립주의는 ‘먼로 독트린’으로 구체화됐고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대체로 대외 개입에 신중한 편이었다. 그런 점에서 2차 대전 이후 지난 70년의 역사야말로 미국이 고향을 떠나 방황해온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제 미국이 피폐해진 심신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얘기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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