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비트의 노래에 맞춰 긴 머리를 휘날리며 능숙하게 웨이브를 하는 소녀. 보아의 첫인상은 ‘무서운 신인’이었다. 소속사는 작심하고 키워낸 준비된 인재의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해 데뷔 티저 광고부터 공을 들였다. 격렬하게 춤추는 보아 옆으로 1부터 13까지 카운팅되는 숫자, 그리고 ‘만 13세, 2000년 8월25일 데뷔’라는 글자가 뜬다.

이틀 뒤 첫 무대를 선보인 이 신인 가수는 애초부터 ‘국내용’으로 기획된 가수가 아니었다. 3년간 SM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으로 지내며 초등학생 때부터 익혀온 영어회화 실력은 수준급이었고, 일본 아나운서와 함께 살며 배운 일본어도 뛰어났다.

소속사의 전폭적인 지원과 어린 나이 때문이었을까. 데뷔 초부터 엄청난 안티가 따라붙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보아 뒤에는 늘 ‘건방지다’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방송계 대선배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 역시 그런 평가에 힘을 싣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데뷔곡 〈ID:Peace B〉와 후속곡 〈사라〉는 소속사가 공들인 만큼, 팬들의 기대만큼 ‘터지지’ 않았다. 그 뒤 보아는 국내 활동보다는 일본 활동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노선을 튼다. 불행히도 일본 첫 쇼케이스에서 치명적인 음 이탈 실수를 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이우일 그림

보아가 가장 처음 외운 한자는 ‘눈물 루(淚)’자라고 한다. “혹시나 실수할지 몰라 100%를 넘어 항상 120%를 준비한다”라는 보아는 프로였고, 프로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기회는 운명처럼 왔다. 혹시나 무대에 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재즈댄스를 배워둔 게 기회가 되었다. 보아는 〈리슨 투 마이 하트〉라는 곡에서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뽐냈다. 모처럼 오른 일본 무대에서 보아는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일본 대중은 그제야 보아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의 성공이 한국으로 옮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보아는 자신의 노래 제목처럼 ‘넘버원’이 되어 있었다.

13세부터 31세까지, 온 국민이 목격한 보아의 성장기

보아의 발자취가 더 의미 있는 이유는, 대부분의 여성 가수에게 주어지는 ‘청순’ 혹은 ‘섹시’라는 틀에 갇히지 않은 채로 자신의 성장기를 그려왔다는 데에 있다. 청순한 소녀도 섹시한 여성도 아닌 어딘가에 보아가 있다. 보아는 ‘오빠’를 찾지도 않았고, ‘쉽게 맘을 주면 안 돼’라며 세상이 여성에게 원하는 수동적인 모습에 고정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보아는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제시했다. 이미 10년 전 〈걸스 온 탑〉이라는 노래로 ‘여자다운 것’을 강요하는 세태를 비판했다. “섹시한, 차분한, 영원히 한 남자만 아는 따분함”이라는 판타지는 모든 남자들의 “착각”이라며 꼬집고, “틀에 갇혀버릴 내가 아니”라며 “나는 나”이자 “내 모습 그대로 당당하고 싶다”고 외쳤다. 여성도 동등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는 현 상황을 떠올리면, “서로 다른 성일 뿐 존재하기 위한 인간”이니 그 사실을 “이제 부정하지 마”라는 〈걸스 온 탑〉의 가사는 시대를 앞서가도 훨씬 앞서간 셈이다.

이후로도 보아의 성장은 계속됐다. 직접 만든 곡을 타이틀곡으로 삼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아이돌 가수 출신이 연기하는 것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와중에도 연기에 도전했고, 첫 정극 연기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보아는 여전히 연습실을 가장 오래 쓰는 사람으로 꼽힌다.

11월5일은 보아의 서른한 번째 생일이다. 열세 살에서 서른하나까지 시간을 건너오는 동안, 온 국민이 보아라는 사람의 성장기를 목격했다. 보아는 이제 이혼 경력 있는 시니컬한 예능 작가로 나와도(JTBC 드라마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그럴싸해 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무대에서야 말해 뭐하랴. 눈빛은 더 깊어지고, 더 능란하게 노래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은 오랜 팬에게만 허락된 기쁨은 아니겠지.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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