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로 시작해야겠다. 나는 작가 임성한의 작품 세계를 다룰 때, 무속과 빙의와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찬 그의 후기작들을 언급하며 현실성이 없는 황당무계한 세계로 도망가는 전개라고 비판했다. 이제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겠다. 그동안 놀림거리였던 대통령의 언어생활, 이를테면 “혼이 비정상”이라거나 “온 우주가 도와” 뒤에 ‘빨간 펜 선생님’ 최순실씨에 대한 대통령의 맹신이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개성공단 폐쇄나 북한 붕괴론, 사드 배치 등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줄 알았던 수많은 정책에 최순실씨의 ‘신통한 견해’가 작동했으리라는 루머도 더 이상 황당하게 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임성한의 세계는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의 황당함이 임성한의 세계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보수의 성지로 여겨져왔던 대구·경북에서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한 자릿수까지 떨어진 초현실적인 정국, 곳곳에서 ‘대통령은 하야하라’는 성명이 발표되고 시민들의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가져온 압도적인 수치심을 떨치고 일어나기 위한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진다. 단견인 탓이겠지만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정치적 체념과 냉소주의, 패배감이 이리도 기묘한 방식으로 해소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의 대중문화에 비친 사회변혁에 대한 전망은 아주 오랫동안 서서히 냉소 일로를 걸었다. 세월호 참사와 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국가 폭력에도 권력은 굳건했다. 아래로부터의 변혁 가능성은 부정되고 ‘위에 있는 놈들은 그놈이 그놈’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사회변혁을 이야기하는 작품조차 정치에 대한 혐오와 엘리트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KBS 화면 갈무리KBS 〈추노〉의 주인공 업복(공형진)은 양반과 상놈의 구분 없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
2010년 KBS 〈추노〉 방영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추노〉에는 신분 차이 없이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젊은 날의 꿈을 잊은 채 제 주변 사람의 행복을 챙기던 이대길(장혁)과, 정의로웠던 주군의 후사를 살려 왕을 바꾸는 혁명을 이루면 새 세계는 알아서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 송태하(오지호) 외에 또 한 명의 주인공이 있었다. 혁명을 일으켜 새 세상을 만들려는 노비의 비밀결사에 소속된 전직 포수 업복(공형진)이다. 업복은 혁명의 대의에 대해 정면으로 묻는다. 자신을 억압하던 양반들에게 복수하고 지금의 자신이 있던 위치로 끌어내리는 데서 혁명이 끝나면, 그저 양반과 상놈이 위치만 바뀔 뿐 똑같은 세상이 아니냐고 물은 것이다. 대길은 오래전에 포기했고 송태하는 상상도 못 했던 세상,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이 모두 평등하게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을 업복은 혁명의 한가운데서 각성한다. 끝내 업복이 꿈꾸던 혁명은 실패하지만, 그의 의지는 그가 살려낸 초복(민지아)과 반짝이 아비(노승진)에게 계승된다. 〈추노〉는 미완의 혁명가 업복의 일대기를 통해 변혁이야말로 정치권력을 독점한 엘리트만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근본적인 변혁은 아래에서부터의 변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대선이 있던 2012년에 방영한 SBS 〈추적자 더 체이서〉에서도 민중이 권력을 심판할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은 살아 있었다. 아내(김성령)가 저지른 범죄를 덮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대선 후보 강동윤(김상중)을 상대하는 주인공은, 대단한 권력을 지니거나 이렇다 할 정계의 끈이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한 강력계 형사 백홍석(손현주)이다. 그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재벌권력 한오그룹과 정치권력 강동윤의 손아귀를 벗어나 검찰 내부에서 버린 카드로 통하는 꼴통 검사의 도움을 받아 진실을 추적하고, 한오그룹 내의 갈등을 역이용해 끝끝내 대선 당일 진실을 밝혀내고야 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은 91.4%라는 기념비적인 투표율로 다른 후보를 당선시키면서 강동윤의 대권 도전을 막아낸다. 방영 당시, 박경수 작가가 설정한 투표율 ‘914’의 숫자를 거꾸로 뒤집으면 ‘419’가 나온다는 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민의 힘으로 부패한 정치권력을 몰아내고 민주공화정을 수복한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 4·19 혁명과 시민의 힘으로 부도덕한 정치인을 견제한다는 작품의 결말은 보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드라마는 시대의 공기를 담아낸다

그러나 모두 아는 것처럼, 2012년 대선 결과는 마치 〈추적자 더 체이서〉가 91.4%라는 변혁의 희망을 숨겨둔 걸 비웃기라도 하듯 51.6%의 득표율로 박근혜 당시 후보가 승리했다. 절망한 이들은 그 무렵 개봉한 영화 〈레미제라블〉(2012)의 수록곡 ‘민중의 노래’를 부르며 희망을 다지기도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과 위헌정당 해산 사건 등으로 정치적 적대자를 말살하려는 노골적인 움직임을 숨기지 않았던 취임 첫해, 세월호 참사 정국과 관련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경찰 차벽과 물대포로 막아 세우는 무자비함을 보여준 취임 2년차, 메르스 사태 부실 대응과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도입 등을 질타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모르쇠로 일관한 취임 3년차가 흐르며 사람들은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잔뜩 좁아진 것을 실감했다. 그 이후에 나오기 시작한 작품들은 그런 시대의 공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SBS 화면 갈무리SBS 〈황금의 시대〉의 태수(고수, 오른쪽)는 불의의 세계에 절망하며 생을 마감한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작품은 〈추적자 더 체이서〉로 인상 깊은 데뷔전을 치른 박경수 작가의 차기작, SBS 〈황금의 제국〉(2013)이었다. 전작에서 시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부패한 대선 후보를 주저앉히는 데 성공하는 비전을 그린 박경수 작가는, 〈황금의 제국〉에 와서 정치도 사법권력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재벌의 세계에 대한 묵시록적인 묘사를 펼친다. 주인공 태주(고수)는 대기업들이 재개발과 건설 붐을 타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철거 용역에게 아버지(남일우)를 잃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재벌보다 더 독한 존재가 되어 그들을 짓밟아주겠다 다짐한다. 재벌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태주는 점점 더 악인이 되어가고, 끝내 젊은 날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되었던 강제 철거도 서슴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 과정에서 농성자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져 동료들이 그의 곁을 떠날 때에도 태주는 멈추지 못하고, 끝내 동료이자 연모의 대상이었던 설희(장신영)가 모든 것을 폭로한 이후에야 정신을 차린다. 그는 “최동성(박근형) 회장이 만든 세상인데 어떻게 이기겠느냐”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전작의 희망은 사라지고, 전작의 절망은 계승됐다. 〈추적자 더 체이서〉의 흙수저 출신 대선 후보 강동윤이 끝내 처가 한오그룹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흙수저 출신 태주는 결국 성진그룹의 견고한 성을 허물지도 그 성의 주인이 되지도 못한다. 희망을 이야기하던 작가가 그려 보인 절망의 극한이었다.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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