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이 다시 걸린 건 3개월 전이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통해 전해진 북한의 군사대화 제안을 최종 거부했다. 4월 초부터 북한은 중국 군부를 통해 미국에 군사대화를 제안했다. 북한의 핵 동결·비확산 문제와 한·미 군사훈련 중단 및 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군부끼리 만나서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얘기가 잘되면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5월 말 방미할 수도 있고 제3국에서 만나도 좋다는 취지였다. 5월 북한 노동당 7차 대회를 앞둔 시점의 제안이라 이것이 성사된다면 많은 변화가 예상됐다. 그러나 미국은 즉답을 피했다. 두 달여간 검토만 거듭하다 최종적으로 거부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시사IN〉 제457호 ‘베이징 북·미 군사 회담은 왜 엎어졌을까’ 기사 참조).

내심 긍정적 답변을 기대했던 중국과 북한 모두 황당해했다. 중국은 중국대로 북한에 체면이 서지 않았다. 또 북핵 문제에 임하는 미국의 태도에 근본적인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대한 군사 진출을 다각화하고 필리핀·인도네시아·인도를 중국 쪽으로 끌어당기며 미국을 아시아에서 배제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북한 역시 반발했다. 6월22일 무수단 미사일이 발사됐고 9월9일 5차 핵실험이 잇따랐다. 한국과 미국은 7월8일 경북 성주 사드 배치를 선언했고 대북 선제공격론으로 맞섰다.

ⓒ연합뉴스10월21∼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북·미 비공개 회담에 참석한 장일훈 북한 유엔대표부 차석대사(오른쪽)와 조지프 디트러니 미국 국가정보국 산하 비확산센터 소장(왼쪽).
표면적인 정세 흐름은 그야말로 일촉즉발 상황의 연속이었다. 미국은 왜 북한의 제안을 거절했을까. 북한의 거듭된 무수단 미사일 발사 실패가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된다. 4월15일부터 시작된 무수단 발사 시험은 6월 초까지 네 차례나 거듭되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당시 대북 소식통은 “무수단 미사일 발사 실패가 미국 군부로 하여금 아직 시간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좀 더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대화 제안이 중국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미국은 중국이 자신의 대북 정책에 보조를 맞추는 선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대화를 하려면 미국이 직접 하지 중국을 통해서 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군사 대화 제의를 거부했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북한이 미국과 군사 대화를 희망하고 있다는 힌트를 얻게 됐다고 한다. 2014년 11월8일 제임스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 방북을 계기로 물밑에서 추진되다 중단된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 레거시 프로젝트(업적 남기기)’의 재가동을 타진할 중요한 계기가 포착된 것이다.

2014년의 클래퍼 방북은 국가정보국이 대북 정책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시사IN〉 제381호 ‘냉전이여, 뜨거운 안녕!’ 기사 참조). 이것을 계기로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및 이란 핵협상에 이어 대북 관계에서도 극적인 돌파구를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과의 관계는 그 뒤로도 계속 오리무중이었다. 클래퍼 방북의 계기를 이어줄 인물로 주목되어온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접촉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게다가 성 김은 지난 5월18일 주필리핀 미국 대사로 지명되었다.

미국과 북한의 비밀스러운 민간 외교

그런데 뜻밖의 희망이 생긴 것이다. 머지않은 시점에 그 계기가 찾아왔다. 바로 6월22~23일 베이징에서 열린 동북아협력대화(NEACD)다. 이는 6자회담 참가국 당국자와 민간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행사로 1993년 10월 1차 회의를 연 이래 매년 한두 차례 개최되었다. 베이징 행사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6월22일 새벽 북한이 두 차례나 무수단 미사일을 시험 발사해 두 번째 미사일에서 성공했다. 북한 대표인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에게 한·미·일 대표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마지막 날인 6월23일 최선희 부국장의 언론 인터뷰에 묘한 대목이 등장한다. 미국 측과 회동했는지를 묻는 기자에게 “예민한 상황이라 미국에 물어봐줬으면 한다”라며 답을 피한 것이다. 회동이 없었으면 부인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회의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궁금증이 두 달 뒤인 8월29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를 통해 풀렸다. CNN 방송의 조시 로긴 국제정치 분석가는 ‘미국과 북한의 비밀스러운 트랙 2(민간 채널 접촉) 외교’라는 제목의 글에서 당시 회의 참석자의 전언을 통해 “최선희 부국장은 북한이 이미 만들어진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겠지만 미래의 핵무기 제조는 협상을 통해 중단할 수 있다는 태도를 표명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최 국장의 발언에 대해 “북한이 ‘우린 협상의 문이 아직 닫히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라는 한 참석자의 평가도 전했다. 로긴은 아울러 “한 참석자는 나한테 ‘당시 회의에 참석한 성 김 대표와 최 부국장이 사이드라인으로 대화를 나눴을 것’이라고 알려줬다”라고 덧붙였다.

10월21~2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로버트 갈루치(전 국무부 북핵 특사)와 조지프 디트러니(전 국가정보국 산하 비확산센터 소장)로 대표되는 미국의 베테랑 북핵 전문가들과 북한 외무성 미국국 한성렬 국장(부상 승진설이 있음)과 유엔대표부 장일훈 차석대사 등 대미 채널 실무 책임자들이 회동했다. 이들의 만남은 9월9일 5차 핵실험 이후 더욱 강경해진 오바마 정부의 대북 제재 움직임과 미국 조야의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론 등 살벌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클린턴과 트럼프 양 대선 캠프에도 들어가지 못한 민간 대화파들의 돌출행동 내지 자가발전으로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또 미국 측 참석자 대부분이 2013년 9월 리언 시걸 박사가 주도한 영국 런던 접촉 이래 매년 정례적으로 열린 북한과의 ‘트랙 2(비공식) 대화’ 멤버다. 이번 회동도 그 연장선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지난해 1월18일 싱가포르 대회 이후 금년에는 핵실험 때문에 열지 못하다가 이번에 연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지난해 싱가포르 대화 자체가 그 전해에 있었던 클래퍼 국장 방북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탐색적 대화’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번 회동 역시 미국 외교의 주특기 중 하나인 민간 채널 활용하기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점이다.

ⓒAFP현재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대학생 오토 왐비어 씨(가운데).

그렇다면 이번 회동을 실질적으로 기획하고 주도한 미국 내 주체는 누구인가. 말레이시아 북·미 접촉을 추적해온 몇몇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9월23일부터 27일까지 이뤄졌던 빌 리처드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가 설립한 리처드슨센터 일행의 방북을 이번 회동과 직결된 움직임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 6월께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북 접촉 움직임이 9월9일의 5차 핵실험 직후 급속도로 빨라졌는데, 그 중심에 바로 리처드슨센터의 방북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센터의 선임 보좌관이자 방문단 대표인 미키 버그먼은 성명을 통해 “방문단은 한성렬 외무성 미국국장을 비롯한 북한 관료들을 만났다. 한국전쟁 때 숨진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을 재개하고, 현재 북한에 억류 중인 미국 버지니아 대학 학생 오토 왐비어 씨(21)의 석방 문제, 북한 홍수 피해 지원 등을 논의했다”라고 밝혔다. 유해 발굴이나 억류자 석방은 미국이 민감한 현안을 숨기고 북한과 접촉할 때 즐겨 쓰는 수법이다. 이 방문 역시 10월 북·미 접촉을 앞둔 메시지 교환 차원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방북과 관련해 주목할 점은 바로  백악관의 태도다. 네드 프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이 이메일 성명을 통해 “리처드슨센터는 방북에 대해 백악관과 협의했으며 백악관은 센터의 인도주의적 노력을 지지한다”라고 이례적으로 밝힌 것이다. 백악관 측의 이 성명은 말레이시아 북·미 접촉의 실질적인 사령탑이 국가안보회의라는 사전 정보와 문맥상 정확하게 일치한다. 워싱턴 내부에 밝은 소식통에 따르면 이번 북·미 접촉은 국가안보회의가 주도하고 국가정보국이 실질적인 역할을 했으며, 국방부도 이 과정을 같이했다. 반면 국무부는 거의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안보회의가 주도했다는 것은 이 접촉이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 레거시 프로젝트’와 직결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바마는 2008년 대통령 취임 때 세 가지 외교적 사안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가운데 쿠바와 이란은 해결했는데 북한만 유독 상황이 악화된 채 후임자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번 접촉은 해결은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실마리 내지 방향은 잡아서 넘겨주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국방부가 참여하고 있는 것은 이번 북·미 대화의 발단이 지난 4~6월의 북·미 군사대화 시도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이해된다. 또한 미국 국방부가 북·일 대화의 사실상 막후라는 점에서 향후 일본의 대북 접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오바마의 ‘대북 레거시 프로젝트’ 가동?

지난 6월 이후 북측과 협상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미국은 다양한 채널을 가동해왔다. 북한이 국무부의 대북 인권 제재에 반발해 국무부와 북한 유엔대표부 간 외교 채널인 뉴욕 채널을 폐쇄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국무부를 대신해 북한 유엔대표부와 새로운 채널이 등장했다. 바로 미국 측 디트러니 전 소장과 북한 측 장일훈 유엔대표부 차석대사 간 채널이다. 이 두 사람이 지난 3개월 동안 핫라인을 구축해 실질적인 막후교섭을 담당했다고 한다.

디트러니는 2005년 9·19 공동성명 당시 미국의 대북 협상 특사였다. 그가 전면에 나섰다는 것은 이번 회담이 사실상 국가정보국의 물밑 주도로 진행됐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바로 국가정보국 국장인 제임스 클래퍼의 최근 발언이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말레이시아 회담 사흘 뒤인 10월25일 미국 외교협회(CFR) 주최 좌담회에서 클래퍼 국장은 “북한 비핵화 개념은 이미 실패한 개념(lost cause)으로 본다. 북한과의 핵협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는 ‘북핵 능력 제한’ 정도이겠지만, 이를 위해서도 북한은 ‘상당한 유인책(significant inducement)’을 요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AFP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 국장(왼쪽)은 “북한 비핵화 개념은 이미 실패한 개념”이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은 테이블 아래에서는 그리 낯선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테이블 위에서는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가 북한 비핵화 원칙을 강력히 견지해왔고, 한국이나 일본·중국에도 그것을 내세워왔다는 점에서 정보기관의 발언치고는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부 차원의 방향 선회를 암시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발언의 시점과 내용으로 볼 때 바로 직전에 있었던 말레이시아 북·미 협상 결과를 감안한 사전 정지작업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 측 협상단 대표인 갈루치 전 특사야말로 1994년 핵 동결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북·미 제네바 회담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또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리언 시걸 박사 역시 평소 북핵 동결부터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 북핵 전문가다. 즉 이번 회동을 통해 북·미가 핵 동결과 평화협정이라는 큰 틀에서 해법을 마련해보자는 합의가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시걸 박사는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정부 간 대화까지 가는 방안을 찾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앞으로 한두  차례 정도 트랙 2 대화를 더 한 뒤 정부 간 대화를 권고하는 협상 결과 보고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북한과 미국 정부가 바통을 이어받아 최소한 북핵 동결과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선에서 오바마 정부의 역할을 매듭지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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