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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사사로운 애국심’

‘통치의 공공성’은 대통령이 갖춰야 할 핵심 덕목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투철한 국가관’으로 대체했다. 이는 통치자에게 무제한의 권한을 보장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 공공성과는 정반대 작동 원리다.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2016년 11월 07일 월요일 제4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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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를 아우르는 정치권의 원로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대통령이 갖춰야 할 핵심 덕목으로 ‘공공성’을 지목한다. 2011년에 낸 책 <대통령의 자격>에서 그는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문제로 국가의 공공성을 훼손한 것을 꼽았다. 2012년 대선 직후에 <시사IN>은 윤 전 장관을 인터뷰하면서 “박근혜 당선자의 공공성은 어떨 것이라 보는가?”라고 물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엄격한 공공의식이나 절제된 언행은 분명한 장점이다. 그런데 이게 근대적·민주적 공공성이라기보다는 국가 전체를 가족 재산으로 봐서 나오는 거 아니냐, 이게 과연 민주주의 국가가 요구하는 공공성이 맞느냐, 이건 위험하다.”

이 노정객의 “위험하다”라는 예언은 집권 4년 만에 더할 나위 없는 방식으로 현실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를 거의 통치 불능 상태에 빠트린 최순실 게이트는 무엇보다도 공공성의 파산이었다.

ⓒ연합뉴스
10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씨 국정개입 의혹에 대해 해명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고 최씨를 두둔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국가관이 투철하고 사사롭지 않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녀의 전임자인 이명박 대통령과 대비되어 박 대통령의 공적인 태도는 더 돋보였다. 여론은 그녀가 친인척과 측근 비리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이 역시 국가관이 투철하다는 이미지 덕이 컸다. 그러나 임기 4년 만에 이 이미지는 크게 위태로워졌다. 통치를 일종의 비즈니스 모델로 보는 지도자는 사익 추구를 위해서라도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 그래야 공에서 사로 자원을 이전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를 세습받은 가산(家産)으로 보는 통치자는 애초에 공과 사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공사 구분 자체가 흐려지기 때문에, 통치는 한없이 사사로워진다. 박 대통령이 가졌다는 ‘투철한 국가관’이란 “근대적 공공성이라기보다는 국가 전체를 가족 재산으로 봐서 나오는” 태도라는 윤여준 전 장관의 관측이 맞아떨어지고 있다.

근대적 공공성이란 무엇을 뜻할까?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존 듀이는 <공공성과 그 문제들>에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이렇게 구분했다. “인간 활동의 결과에는 두 종류가 있다. 직접적인 교류 당사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과,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별하는 근원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듀이에게 국가란 이 ‘공적인 것’을 집행하기 위한 “조직화된 공공성”이다.

국가의 모든 의사결정은 결정 당사자들을 훌쩍 뛰어넘는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므로 ‘공적인 것’이다. 국가의 결정 때문에 누군가는 이익을 보고 누군가는 손해를 보지만,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공공성이 훼손되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과)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결정이란 거의 필연으로 누군가에게는 손해를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그 결정이 공동선에 입각한 것이라고 입증해 손해 본 이들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구체적으로는, 적법 절차를 따르고, 논의 과정을 공개하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 공공성은 그럴 때 충족된다.”

국가는 인민이 권력을 위임한 기구다. 그렇기에 제 힘을 휘두르는 과정을 납득시켜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투명한 정보공개, 공개 토론, 적법 절차다. 통치의 공공성을 구성하는 핵심 기둥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투철한 국가관’을 자랑하는 통치자는 보통 반대로 움직인다. 그 통치자에게는, 자신의 결정은 곧 국가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곧바로 ‘공적인 것’이 된다. 정보공개도 적법 절차도 생략 가능하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2015년 퇴임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애국심 그 자체다. 나라 생각밖에 없는 분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식의 묘사는 박근혜 정부 들어 참모들로부터 유난히 자주 듣는다. ‘투철한 국가관’ 신화는 통치자에게 무제한의 권한을 보장하는 논리로 이용된다. ‘애국심 그 자체’가 내린 결정이니 따져볼 것도 없이 공공성을 충족한다고 간주된다. 이것은 통치자를 제약하는 근대적 공공성과는 정반대 작동 원리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굵직한 판단이 공식 의사결정 절차와 공개 토론을 통해 내려진 사례를 찾기 힘들어졌다. 사드 배치 결정 발표 순간에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백화점에서 양복을 수선하고 있었다. 개성공단 폐쇄 결정 과정에서 주무부처인 통일부는 ‘잠정 중단’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보도가 나왔다(통일부는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한다). 개성공단 폐쇄 결정은 공단에서 사업을 하던 기업과 노동자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피해 기업들이 주장하는 추산 피해액은 약 1조5000억원이다. 이 자체는 공공성의 훼손이 아니다. 이 의사결정을 납득하게 만드는 과정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대목이야말로 공공성을 훼손했다.

ⓒ연합뉴스
10월27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오른쪽)와 정진석 원내대표가 굳은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최순실’을 대입하면 모든 것이 납득되니

최순실 게이트는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이라는 대목에서는 특별하지 않다. 비선 실세들은 거의 모든 정권에서 있었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는 다른 정권의 사례들이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사사롭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최순실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수정했다는 사실은 박 대통령도 인정했다. 최씨가 만진 연설문 중에는 박근혜 정부의 초기 대북정책을 규정한 ‘드레스덴 선언’도 있다. JTBC의 추가 보도로, 최씨가 외교안보상 1급 비밀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의견을 냈다는 의혹도 무더기로 제기된 상태다. TV조선은 최씨가 문화체육부 예산안 편성에도 적극 개입했다는 의혹을 집중 보도했다. 의혹이 제기된 범위가 대통령의 패션부터 메시지, 외교안보, 인사, 예산 등 사실상 국정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다.

박원호 교수는 과거 비선 논란과 차이를 이렇게 짚었다. “과거 정권의 비선은 어쨌거나 대통령의 조언자이고 최종 판단은 결국 대통령이 한다는 것은 의심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은 유권자의 정서적 체감이 다르다. 그간 잘 이해가 되지 않던 통치 행태가 여럿 누적이 되어 있는데, 거기에 ‘최순실’을 대입해보니 하나같이 납득이 되는 거다. ‘통일 대박’이나 ‘혼이 비정상’과 같은 낯선 메시지도 그렇고, 개성공단이나 사드 관련 의사결정도 그렇고. 비선이 실제로 개입했든 아니든 간에, 유권자들은 ‘아, 그 장면이 최순실이었구나’ 하고 이미 결론을 내려버린 것 같다.” 최순실은 그동안 시민이 납득하기 어려워했던 여러 장면들에 ‘맞춤형 해답’을 제시하면서, 조언자 수준이 아니라 통치를 통째로 외주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통치의 공공성은 ‘투철한 국가관’으로 대체되면서 크게 후퇴했다. 비선의 국정 개입 의혹은 최순실 본인이 최종 국정 운영자라는 인상을 여론에 줄 정도로 폭 넓고 심도 있게 제기되었다. 거기에 최순실 일가의 독특한 종교적 성향이 겹치면서, ‘무당 통치’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비선이 공적 시스템만으로는 부족한 합리적 조언을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무너뜨린다. 모든 장면에서 공공성이 후퇴하고 일련의 사사로움이 조합된 끝에 “이게 나라냐”라는 한탄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터져 나왔다.

국가 지도자가 공공성을 훼손하는 것만큼 중대한 결격사유도 흔치 않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공식 시스템보다는 비선 통치를 선호하는 것은 40년에 걸쳐 일관된 성향이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 일가의 특수관계는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즉, 박 대통령이 이번과 같은 위험요소를 가진 지도자라는 사실은, 가까이서 보좌한 정치인이라면 2012년에도 2007년에도 예측 가능했다.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등 주요 정치인이 공동 책임을 요구받는 이유다. 유승민 의원, 김무성 의원 등 새누리당 대선 주자들도 앞으로 관련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역대 어느 정권과 비교해보아도, 최순실 게이트의 폭발력은 이례적이다. 공공성의 후퇴와 비선의 약진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공적인 것’의 빈 공간이 유례없이 크게 발생했다. 그러나 동시에, 비선 논란 자체는 어느 정권에서나 반복되어온 고질병이라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최순실은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6공화국 내내 반복된 현상이라는 의미다.

ⓒ연합뉴스
김무성 의원(왼쪽)과 유승민 의원(오른쪽) 등 새누리당 대선 주자들도 ‘최순실 게이트’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선은 왜 반복되는가’를 물어야 할 때


무슨 뜻일까.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지금은 오히려 ‘비선은 왜 반복되는가’를 물어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왜 청와대가 모든 의사결정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까. 왜 대통령은 내각이 아니라 비서실을 통해 밀실 통치를 할까. 왜 대통령은 필요 이상으로 비밀주의에 싸여 있을까. 결국 대통령이 공적 토론·정보공개·적법 절차 원리를 따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것 아닌가. 정치세력이라면 사건의 선정성에 편승하기보다는, 대통령이 어떻게 공공성 원리를 따르도록 할지를 놓고 대안으로 경쟁해야 한다. 수권을 준비하는 정당은 ‘우리가 집권하면 이런 방식으로 비선 위험을 제어하겠다’라는 안을 내놓고 그걸로 평가받을 때다. 그것이 최순실 게이트의 충격이 가라앉은 후에도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할 정치 세력의 책무다.”

2012년 대선 직후 <시사IN>과 윤여준 전 장관의 인터뷰 마지막 질문은 이랬다. “박근혜 당선자가 공적 체계보다는 비선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비판은 새누리당 안에서도 나옵니다.” 노정객의 답은 지금 더 의미심장하다. “측근 중에 정말 유능한 사람이 있어서 꼭 써야 하겠다면 비선으로 두지 말아야 합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앉히면 되잖아요? 못 그럴 사람이면, 힘 실어주지 말라는 거고. 비선 중심으로 청와대를 운영하면, 아이고 큰일 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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