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10월25일 최순실씨에 대해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라고 표현했다. 최순실씨는 박 대통령이 ‘영애 시절’부터 가까웠던 고 최태민의 딸이다. 40년에 달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최순실씨의 인연을 각종 기록을 바탕으로 짚어봤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1975년 박근혜 당시 영애에게 최태민이 전했다는 메시지(〈김형욱 회고록〉)

‘고 최태민 목사’라 불리는 최태민은 1912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중앙정보부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고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불교·기독교·천도교를 복합한 영세교(영세계) 교리인 영혼합일법을 주장하고 자신을 ‘칙사’ ‘태자마마’로 칭하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고 되어 있다. 최태민은 그의 일곱 번째 이름이며,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3남6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타파 화면 갈무리〈뉴스타파〉는 1979년 6월 열린 ‘제1회 새마음 제전’에서 최순실씨(왼쪽)가 박근혜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오른쪽)를 밀착 수행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최태민은 1975년 박근혜 당시 영애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인연을 맺는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뒤 위로 편지가 쇄도하던 때였다. 편지의 내용은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 근혜양을 도우라 했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김형욱 회고록〉). 이른바 ‘현몽’(죽은 이가 꿈에 나타남)설이다. 최태민도, 박근혜 대통령도 이 ‘현몽’ 내용은 부인했다. 현몽설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육영수 여사 피살 뒤 최태민이 위로 편지를 보냈고, 이를 본 박근혜가 1975년 3월6일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만난 것은 사실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다.

“대한구국선교단(총재 최태민·58)이 주최한 구국기도회가 (…) 이 기도회에는 박 대통령의 영애 근혜양을 비롯, 각 교파를 초월한 신도 1000여 명이 참석했다.”
-1975년 5월5일자 〈경향신문〉 기사

박근혜와 만난 다음 달인 1975년 4월 최태민은 목사 안수(위 ‘중앙정보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 안수 역시 사이비 교파로부터 받았다)를 받고 ‘대한구국선교단 총재’로 취임한다. 두 사람은 1975년 5월4일 공개석상에서 처음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데, 바로 최태민이 총재인 대한구국선교단의 구국기도회에서다. 5월11일 박근혜는 최태민의 제안으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로 추대된다. 이후 대한구국선교단 십자군 창설 등 행사에 자주 참석해 격려한다. 1976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 부설 구국여성봉사단이 창단되었다. 역시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에 추대됐다.
 

ⓒ동아일보1977년 3월 대한구국봉사단이 세운 경로병원 개원식에 참석한 당시 박근혜 명예총재와 최태민 총재(왼쪽)의 모습.

1978년 2월 박근혜는 사단법인으로 발족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에 정식 취임했고 최태민이 명예총재에 올랐다. ‘중앙정보부 수사자료’는 이 봉사단에 대해 “박근혜가 총재로 취임한 이래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 격인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썼다. 재벌급 기업인으로 운영위원회를 발족해 거액의 운영자금을 조달했다고도 되어 있다. 구국여성봉사단은 1979년 5월 사단법인 새마음봉사단으로 확대 개편됐다.

“꿈 많던 대학 시절 나는 그분을 처음 뵙게 되었다.” -1987년 여성 잡지 수기에서 최순실씨

최순실씨는 대학 시절 당시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을 처음 만난다. 〈우먼센스〉 1994년 8월호 인터뷰에서 최순실씨는 박근혜 대통령을 대학 1학년 때인 1976년 흥사단 행사에 참가해 처음 봤다고 했다. “계속해서 지켜보았는데 참 깨끗한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흐트러짐이 없고, 욕심도 없어요. 게다가 물러설 줄도 아는 분입니다. 아버님도 같은 생각이셨던 것 같아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40년 우정’을 이어준 것은 다름 아닌 ‘새마음’이었다. 1978년 전국 중·고등학교와 대학마다 새마음회가 조직됐다. 그해 9월 전국 11개 시도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모여 새마음 전국학생연합회를 조직한다. 11월에는 전국 중·고·대학생이 참여하는 대규모 발대식이 열린다. 여기에는 박근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가 직접 참석해 격려했는데, 그 격려를 받은 학생 중 하나가 당시 전국새마음대학생 총연합회장이던 최순실씨다. 인터넷 언론 〈뉴스타파〉는 1979년 6월10일 열린 ‘제1회 새마음 제전’에서 최순실씨가 박근혜 당시 총재를 밀착 수행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최순실씨는 앞서의 수기에서 “그 모임의 규모가 전국의 시도 단위로 커지고 (중략) 활동영역이 넓어지다 보니 폭 넓은 지원이 아쉬웠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큰 영애 박근혜 이사장을 뵙기로 했다”라며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나 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또 대학원 2년 동안에도 “그분이 주도하는 대학생 활동의 후원자 역할”을 계속하면서 박 대통령과의 관계가 지속됐다고 적었다. 최씨에 따르면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나면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1980년 새마음봉사단도 해체됐다. 이 시기 박근혜 대통령은 칩거에 들어간다. 최태민이라는 이름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회관 직원들은 작년부터 최태민씨가 회관 일에 적극 개입했다고 한다. 최씨는 직원들 사이에서 ‘최 회장’이라 불렸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 기사

최태민이라는 이름은 박근혜 대통령이 1983년부터 이사장을 맡은 육영재단 어린이회관에서 다시 등장한다. 어린이회관 직원 150여 명은 1987년 9월 ‘어용 간부 퇴진’ ‘족벌체제 종식’ ‘외부 간섭 배제’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 외부 간섭의 주체로 지목된 인물이 바로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씨다. 당시 직원들은 박근혜 이사장이 어린이회관 사안을 결재하기에 앞서 최태민이 먼저 결재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당시 어린이회관과 자매결연을 한 C종합학원을 운영하던 최순실 원장이 ‘한국아동교육문제연구소’를 통해 잡지 〈어깨동무〉 등 편집에 과도하게 간섭한 것에 반발했다.
 

ⓒ연합뉴스육영재단 운영을 둘러싼 형제간 갈등 와중에 폭력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최순실씨는 〈여성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이사장의 요청으로 조언을 한 게 그들의 주장대로 ‘편집권의 침해’였다면 박근혜씨에게 미안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순실씨는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1986년 C학원을 개설하고 어린이회관과 자매결연을 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우연히 만났다고 말한다. “아버지 이름을 말씀드리고 제가 학원을 하는데 시설을 이용하게 편의를 봐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어요. 열심히 해보라며 아버지 안부를 물어 잘 계시다는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어요. 그 뒤로도 저희 학원이 어린이회관을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박근혜씨가 회관을 돌아볼 때면 만나볼 수 있었어요.” 앞서의 수기에서 최순실씨는 박근혜 이사장이 “교육자로 변신한 나를 바라보며 반가운 눈인사를 건넸다. (한국아동교육문제연구소 설립 추진에 대해) ‘무척 바람직한 일’이라며 관심을 보였다”라고 썼다.

“부디 저희 언니와 저희들을 최씨의 손아귀에서 건져주십시오! 진정코 저희 언니는 최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밖에 없습니다.”
-박근령·지만씨가 1990년 8월14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1987년에 벌어진 육영재단 갈등은 최태민 측근과 농성 주도자의 사표를 수리하는 선에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1990년 ‘최태민 전횡 반대’라는 같은 이유로 다시 터졌다. 두 번째는 훨씬 극적이었다. 박근령·지만씨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탄원서까지 썼고, 박근령씨는 1990년 10월 언론 인터뷰에서 “물러날 사람은 언니가 아니라 최태민이다”라고 말했다. 대통령경호실 출신과 최태민에게서 쫓겨난 이들로 구성된 ‘숭모회’라는 단체가 ‘박근혜 이사장 퇴진’을 외치고, 박근혜 대통령 조직 ‘근화봉사단’이 ‘박근혜 이사장 퇴진 반대’를 외치면서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이사장직을 사임했다.

당시 일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경선 청문회에서 “순전히 오해다. 최태민씨나 최순실씨가 결코 육영재단 일에 관여한 적이 없다”라고 해명했다. 최순실씨가 육영재단 운영으로 돈을 벌어 강남에 수백억원대 부동산이 있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도 “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다”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박근령·지만씨는 앞서의 탄원서에서 최태민에 대해 “유족이 핵심이 된 각종 육영사업, 장학재단, 문화재단 등 추모사업체에 깊숙이 관여해 회계장부를 교묘한 수단으로 조작하여 많은 재산을 착취했다. 지금은 서울 강남 및 전국에 걸쳐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라고 썼다. 실제로 최태민 일가는 1983년 이후 수백억원대 부동산을 매입했다. 육영재단 고문으로 불렸으며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와 근화봉사단 고문으로도 활동한 최태민은 1994년 사망했다.

“순수하게 도운 것이다. 그게 인연이 돼 국회의원 됐을 때 입법보조원으로…. 이후 당 대표 때 그만뒀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청문회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

 

ⓒ시사IN 이명익최순실씨의 전남편 정윤회씨는 1998년 박근혜 의원실에서 보좌관을 지냈다. ‘비선 실세’ 의혹이 끊이지 않는 인물이다.

1998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정치의 시작을 최순실씨 전남편 정윤회씨와 함께했다. 정씨는 1998년부터 박근혜 후보의 의원실 보좌관으로 의원실을 진두지휘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정씨가 최태민 사위라는 것을 알았는지에 대해선 답하지 않은 채 “순수하게 도운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2002년 박 대통령이 탈당해 만든 한국미래연합에서는 총재비서실장을 지냈다.

정윤회씨는 2004년 박근혜 대통령이 당 대표가 된 이후 물러났다고 하지만, 이후에도 ‘비선 실세’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2016년 10월25일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 사과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까지 일기를 엮은 수필집을 여러 권 냈는데,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1981년 8월14일) 등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에 대한 불안과 불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래서인지 박 대통령은 자신이 믿는 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 “함부로 얘기만 듣고 나쁜 사람이니까 상대 안 한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문제가 있지 않은가”(2007년 한나라당 경선 청문회)라고 말하곤 했다.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은 최순실씨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녹취가 있다고 〈한겨레〉에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언니 옆에서 의리를 지키고 있으니까, 내가 이만큼 받고 있잖아.”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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