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27일,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다. 엄살이 많은 뮤지션이었다. DJ를 맡았던 라디오 방송에서는 자기 입으로 불세출의 음악가니 동양에서 온 신비로운 아티스트니 이야기했지만, 토론 프로그램 출연 이후에는 “독설가 이미지 때문에 뮤지션으로서의 내가 사라졌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늘 자신은 보컬리스트로서는 재능이 없으며 다한증 때문에 기타를 못 쳐서 기껏해야 스쿨밴드 기타리스트 실력밖에 안 된다고 자평했다. 마지막으로 발표한 앨범의 장르에 대해 “나는 그냥 잡탕으로 여러 음식을 내놓는 분식집을 운영하는 식이다. ‘오늘은 깍두기 스파게티를 만들었어요’라고 말하는 한심한 모습이 내 정체성이다. 어쩌겠나”라고 말했다. 그가 대마를 피우고, 장르를 바꾸고, 정이 들 만하면 밴드 멤버를 교체하고, 팬들과 싸우고, 정치적 발언 때문에 문화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오르내릴 때에도 그를 인내해줬던 팬들 처지에선 그 엄살이 가히 즐겁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그 엄살은 자부심의 거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 한 장르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댄스면 댄스, 발라드면 발라드, 프로그레시브 록과 헤비메탈, 인더스트리얼 테크노, 국악에 이르기까지 손댄 장르마다 그 장르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앨범을 하나씩은 남겼다. 연주자로서도 보컬로서도 톱클래스는 아니었지만 동시대 최고의 록 밴드를 이끄는 수장이라는 자부심에 가득 찬 사람이었고, 엄정화부터 전람회, 이승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가요사의 굵직굵직한 이름들을 프로듀스한 정상급 프로듀서였다. 소속 팀이 해산할 때 그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라고 말했는데, 연예인들의 언행에 지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대던 그 시절에도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음악 활동을 하지 않을 때에도 그는 심야 라디오 DJ와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 끊임없이 당대의 청춘들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 말들이 어찌나 힘이 셌던지 하마터면 모 남성 잡지 한국판 편집장 자리에 오를 뻔하기도 했다. 비록 라이선스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끝내 무산되긴 했지만.

그가 죽고 나서야 그를 아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평생 철저히 개인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로 살았던 그는 남들에게도 그렇게 살아갈 것을 독려했다. 가끔은 시스템을 이탈한 삐딱이를 죄다 탈락시키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난 슬플 땐 그냥 맘껏 소리내 울고 싶어.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다”(〈나에게 쓰는 편지〉)라고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늘 메시지의 귀결은 “끝없이 줄지어 걷는 무표정한 인간들 속에”(〈껍질의 파괴〉)서 탈주하자는 이야기였다.

빛나는 자부심과 겁에 질린 엄살의 공존. 틀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인간상만을 강요하는 세상 속에서 ‘공교육 절멸’을 소리치며 “지가 하고 싶은 대로”(〈A.D.D.A〉) 하고 살자고 외쳤으니 어찌 그 두 가지가 함께하지 않았으랴. 그러나 그는 두려워질 때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일은 너 자신을 믿는 데서 시작하는 거”라며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완전히 바보 같은 일일 뿐”(〈Hero〉)이라고 다짐했고 그 다짐을 자신의 팬들과 나누었다. 나는 그렇게 살 거라고, 우리도 그렇게 살자고.

그가 신보 발매를 코앞에 두고 너무도 허망하게 46년 5개월 21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오랜 변덕과 엄살을 참아내던 이들은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팬도 별로 없다고 갖은 엄살을 다 부렸지만,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찾아온 이들의 줄은 길고도 길었다. 오일장을 치르는 동안 1만6000여 명이 그의 영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만날 앓는 소리만 하더니, 이 인간은 자기를 아끼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알았을까.” 함께 빈소를 찾았던 친구가 웃는 낯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마 뻔히 알고 있었을 거야, 미운 사람.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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