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신기생뎐〉(2011)의 주인공 단사란(임수향)의 불행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가부장제에서 출발한다. 생부 금어산(한진희)은 생모 한순덕(김혜선)과 하룻밤을 보낸 뒤 한순덕을 책임지지 않는다. 무책임한 양부 단철수(김주영)와 허영심 많은 계모 지화자(이숙)는 사란에게 기생이 될 것을 강권한다.

사란이 살아온 세계에서 남성·가장은 권위만 누리며 그 책임은 행사하지 않는 무기력한 폭군들이다. 그렇다면 사란의 운명은 어떤 식으로 구제되는가. 자신과 사귀네 마네를 놓고 드라마 내내 줄다리기를 했던 부잣집 도련님 아다모(성훈)와의 결혼으로 답을 찾는다. 가정 내에서 경제력을 무기로 폭군처럼 군림하던 아다모의 아버지 아수라(임혁)는 사란을 내내 못마땅해하며 결혼을 반대했다. 사란은 매 끼니 영양사를 방불케 하는 균형 잡힌 식단과 함께 “연어는 산성이라 알칼리성 매실절임과 먹으면 궁합이 맞고 개운해요” 따위 설명으로 아수라의 환심을 산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가부장이 남긴 상처와 아픔을, 애써 다른 가부장제 가정의 그늘 아래 편입하려 발버둥치는 것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SBS 화면 갈무리 〈신기생뎐〉에서 남성·가장은 권위만 누리며 그 책임은 지지 않는 무기력한 폭군들이다.
고초를 겪었던 주인공이 가부장제 가정 질서 안에 편입되어 행복을 얻는다는 식의 결말은 한국 홈드라마의 지배적인 스토리 구조다. 그러나 임성한이 유달리 더 문제인 까닭은 주인공이 겪는 고초의 원인과 해결 방안 모두를 가부장제의 정상 작동 여부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무책임한 아버지의 권위를 박탈하고 비난하던 여주인공이 시댁 식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딸기는 칫솔로 씻어줘야 농약이 잘 씻겨 나간다”는 식의 생활 정보로 환심을 사려 하고(〈인어 아가씨〉), 기껏 부모의 무책임을 물어 부모를 집안에서 쫓아낸 자녀들이 어영부영 반성하고 화해하며 다시 정상 가정의 틀을 복원하는가 하면(〈보석 비빔밥〉, 이상 MBC), 출산을 통해 실어증을 극복하고 남편과 행복한 미래를 설계한다(SBS 〈하늘이시여〉).

홈드라마의 거장 김수현이 가부장제의 변화를 촉구하거나 그도 여의치 않을 때는 가부장제에서 아예 탈주하는 주인공(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을 그리는 동안, 임성한은 이 모든 갈등은 가부장이 가부장답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고 유능하고 선량한 가부장의 그늘 아래 들어가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세계를 그린다.

여기에서 임성한의 반동적인 전략이 빛을 발한다. 가정 문제의 시발점을 가부장제에 대한 비난으로 잡은 것은 보는 이들의 공감이나 이목을 사기 쉬운 설계다. 임성한은 〈아버지〉나 〈가시고기〉처럼 헌신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영웅으로서의 아버지를 그리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대신, 이 모든 갈등의 근원으로 아버지를 지목함으로써 가려웠던 구석을 긁어준다. 그러나 이 갈등과 상처는 자신을 숙이고 더 선량하거나 더 능력 있는 시아버지의 그늘 아래 들어가면 어떤 식으로든 봉합이 된다. 이 새로운 관계에서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시댁 식구들을 설득하는 건 주인공의 몫이고, 그 가정의 평화와 안녕을 지키는 건 포섭된 시아버지의 몫이 된다. 임성한은 이처럼 가부장제 가정의 실패를 실컷 전시하며 문제를 인식하는 모양새를 보여주되, 그 체제가 다른 환경에선 얼마나 성공적으로 작동하는지 보여주면서 체제 자체의 한계를 아버지 혹은 시아버지 개인 역량의 문제로 축소해버린다. 더 나아가 그 체제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건 당사자의 노력 여하에 달린 일로 묘사함으로써 책임을 분산시켜버린다.

ⓒSBS 화면 갈무리 임성한 작가의 작품은 아버지에게 책임을 추궁해놓고 ‘선량한 가부장’를 만나 행복을 찾는 퇴행적 서사를 반복한다. SBS 드라마 〈신기생뎐〉의 한 장면.
심지어 임성한의 세계에서 권선징악과 고생에 대한 보상은 운명적으로 이뤄진다. 사란의 결혼식 날 공교롭게 양부와 계모가 사고를 당해 신부 부모 자리가 비어 있는 상황, 사란의 친구 금라라(한혜린)는 최근 재혼한 자신의 수양아버지 내외를 대신 앉히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라라의 수양아버지는 공교롭게도 사란의 생부 금어산, 최근 재혼한 새 수양어머니는 사란의 생모 한순덕이다. 양부와 계모의 교통사고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의붓딸이라고 기생을 만들어서 받은 천벌”로 평가받는다. 주인공이 성공적으로 새로운 가부장제 가정 내에 편입되는 날, 나쁜 가부장은 천벌을 받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헤어졌던 가족은 재결합한다.

자연스레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이 선을 추구하기 위해 자력으로 노력할 필요도, 체제와 불화를 빚어가며 제 공간을 얻어내기 위해 투쟁할 이유도 사라진다. 좋은 가부장제에 포섭될 목적으로 자신을 숙이려고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악은 징벌받고 선은 보답을 받는다. 이런 기막힌 운명론에 비하면, 아수라가 귀신에 들려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정도의 설정은 차라리 귀여운 축에 속한다.

‘개인적 일탈’이라는 마법의 단어

대중은 이러한 임성한의 세계관을 ‘막장’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도 막상 시청을 시작하면 헤어나오지 못하고 관람을 지속한다. 많은 이들이 그 비결을 궁금해하는데 사실 특별히 비결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 체제 자체의 구조적 한계를 오로지 개인의 역량 탓으로 축소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당사자의 노력 여하에 달린 일로 묘사함으로써 체제의 개선이나 변혁을 포기하게 만드는 레토릭은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서사였다. 대통령 한 사람만 백마 타고 나타난 초인적인 정치인으로 바뀌면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이 기적처럼 해결된다는 식의 정치 서사, 선량한 자본가의 미담 사례를 통해 몇몇 나쁜 자본가의 악덕을 꾸짖고 재벌의 한계를 슬그머니 어쩔 수 없는 현실쯤으로 여기게 하는 경제 서사, 체제의 한계보다는 당사자의 노력 부족 탓으로 설명하는 사회 서사 속에서 홈드라마의 담론이라고 딱히 다를 리 없었다. 시청자들은 자연스레 자신들에게 주입된 세상의 논리에 가장 충실한 드라마를 선택했고, 그것이 임성한의 작품이었을 뿐이다.

임성한의 은퇴가 안도나 새로운 전망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장르 마스터는 은퇴를 선언하고 오랜 침묵에 들어갔지만, 구조적 문제를 인지하는 척하면서 문제의 성격과 책임을 개인에게 돌려버리는 레토릭은 브라운관 안에서든 밖에서든 여전히 건재하다. 모든 해명을 ‘개인적 일탈’이라는 마법의 단어로 설명하고,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말로 시스템 자체는 정상적인데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여서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이라는 세계관을 설파하는 시대 아닌가.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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