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잡지 만화와 2000년대부터 유행하여 오늘날 대세가 된 웹툰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특징을 보인다. 그중 한 가지는 제작 기법이다. 잡지 만화는 주로 종이와 펜을 이용한 수작업으로 제작되었으나 대다수 웹툰은 컴퓨터와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한 디지털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디지털 제작 방식이 도입되면서 만화가들은 실수로 잘못 그은 선이 원고를 망칠 수 있다는 압박감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3D 모델링, 픽셀 아트 등 펜과 잉크를 쓰던 시절엔 상상할 수 없던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제작 방식이 널리 퍼지면서 만화가가 숙련해야 할 기술의 문턱은 낮아진 반면, 그림 스타일은 더 개성 있고 다양해졌다.

컴퓨터 성능이 좋아지고 프로그램의 기능이 강력해질수록 디지털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원고는 수작업으로 제작된 원고를 닮아간다. 하지만 아직 수작업으로만 가능한 특정한 기법들-예를 들면 펜 선의 미묘한 굵기 변화, 수채화의 농담 표현-은 디지털 제작 방식으로 완전히 구현할 수 없다. 디지털이 대세가 된 지금도 수작업의 가치는 줄지 않고 오히려 높아지는 추세이다.

수작업으로만 낼 수 있는 질감이 느껴지는 웹툰 한 편을 소개하려 한다. 윤인완이 스토리를 쓰고 김선희가 그림을 그린 〈심연의 하늘〉(네이버 웹툰)이다. 작품의 도입부는 부서진 폐허의 조감도로 시작한다. 콘크리트 파편, 부서진 유리 조각, 나뭇잎 하나까지 꼼꼼히 묘사한 거칠고 가는 펜 선의 표현력에 압도되어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부서진 합정역 표지판이 서 있고, 주인공 두 명이 화면 바깥의 독자를 바라보고 있다.

〈심연의 하늘〉의 장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코즈믹 호러’에 걸쳐 있다. 현대 문명이 멸망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생존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는 설정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 속한다. 사람들을 덮치는 재앙이 끝이 없고, 그 규모가 우주적 크기라는 설정은 코즈믹 호러의 특징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사람들이 엄혹한 환경에 맞서 힘을 합치거나, 서로 갈등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코즈믹 호러에서 방점은 인간이 아니라 재앙 그 자체에 찍힌다. 인간들은 절망적인 현실에 맞서 싸우지만 대개 고통 속에서 미치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짐작대로 코즈믹 호러 장르물에 나오는 잔혹한 표현은 그 수위가 매우 높다. 게다가 이 장르물은 재앙의 규모를 독자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스토리 전개가 불친절한 면이 있다. 〈심연의 하늘〉이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다.

작품의 배경은 지옥이 된 한국인데, 가끔씩 현실을 반영한 장면이 등장하여 깊은 인상을 남긴다. 주인공 중 한 명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각오로 공부하여 서울대에 합격한다. 해방감을 만끽하던 합격자 발표 날 재앙이 닥치고, 주인공은 생존 투쟁을 시작한다. 서울대에 가기 위해 공부한 시절의 각오를 되새기며 주인공은 싸워 나가고, 폐허 속을 헤매다가 서울대학교 입구 조형물 앞에 다다른다. 그녀를 맞이한 것은 조형물에 줄지어 매달린 목 맨 시체들이었다.

중세에 그려진 지옥도에는 지옥에 떨어진 인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고문당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당시 실제로 행해진 형벌을 묘사한 것이라 한다. 상상으로 만들어진 지옥은 마찬가지로 지옥 같은 현실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기자명 박해성 (만화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