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한없이 복잡해서 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를 관통하는 기본 원리를 알아내는 이들이 드물게 나타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인류는 그동안 얼마나 무지몽매했는지 깨닫고는 새삼 놀랐다. 19세기 초 지질학계는 근본 문제를 놓고 끙끙댔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세계에서 가장 깊은 스위스의 비코스 협곡,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같은 장엄한 단층을 누가 만들었느냐는 것이었다.

다수의 학자들은 어느 시기 지구에 닥친 엄청난 격변이 순식간에 이와 같은 풍경을 만들어냈으리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던 중 영국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은 영겁의 세월 동안 물줄기가 흐르면서 조금씩 바위를 깎아낸 끝에 이 거대한 작업을 완수하게 됐으리라는 주장을 폈다. 그 모든 일이 물 한 방울에서 비롯했다는 그의 생각은 숱한 조롱과 비난의 재료가 됐지만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주류 이론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많은 지질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충분한 증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성원 그림
찰스 라이넬의 주장을 경청한 이가 다른 분야에도 있었다. 그즈음 생물학계 역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교통이 점점 발전해 지구가 좁아지면서 영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의 자연사박물관은 예전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동물과 식물표본으로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과거의 분류 체계로는 감당을 못할 정도로 너무나 종이 다양해 생물학계는 넋을 잃었다. 그동안의 주류 이론 노릇을 해온 기독교의 창조론을 답습하기도, 그것을 뒤집는 통합 이론을 세우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난감한 그때에 영국의 자연학자 찰스 다윈이 돌파구를 열었다. 그는 무수한 세대를 거치면서 종이 서서히 변한다는 이론을 들고나왔다. 우리가 신이 아닌 원숭이의 후손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초파리와도 먼 친척일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그는 1859년 11월22일 발간한 저 유명한 책 〈종의 기원〉에서 자기가 지질학자인 라이엘에게 큰 빚을 졌다고 분명히 밝혔다. 다윈은 살벌한 위협의 표적이 됐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종의 기원〉 이후의 생물학은 그전의 생물학과는 완전히 다른 종으로 진화해가는 중이다.

오랫동안 인문학을 하는 이들이 고심해온 문제가 있다. 어째서 인간은 같은 종인 인간을 학살하고 괴롭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바로 폭력의 역사다. 고대나 중세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도 무고한 이들이 끊임없이 피를 흘린다. 양차 대전 중이야 그렇다 쳐도, 냉전이 끝난 뒤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인종은 노예화되고 청소되는 중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통합 이론을 세우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최근 주목되는 사람 중 하나가 유럽 사상 연구자인 존 그레이다. 영국 런던 정경대 교수를 지냈으며 그동안 관련 책을 수십 권 쓴 그는 철저한 반휴머니스트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저지른 모든 비극의 배후에는 종교가 있다. 근대 정치사는 종교사의 한 장에 불과하다. 구원과 진보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오히려 인간에게 재앙을 부른다.

존 그레이에 따르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말세에 산다고 믿었다. 초기 기독교는 곧 이 세상이 망하고 악이 완전히 소멸할 것이며 그때에는 질병과 사망, 기아와 굶주림, 전쟁과 억압이 모두 영원히 사라지리라는 신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되면 신을 받아들인 자들은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이전의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후대의 기독교 사상가들, 이를테면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이들은 종말을 영적 변화를 의미하는 은유로 재해석해 종말론에 내재한 위험을 누르고자 했다. 이후 기독교 주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받아들였지만 종말론은 강하게든 약하게든 기독교 내부에 녹아 있었다.

이 종말론은 종교개혁 시기를 전후해 천년왕국 운동의 형태로 되살아나 중세의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전쟁, 전염병, 빈곤을 지겹도록 경험해 세상에 환멸을 느낀 이들이 주로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새 세상을 열자는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이 운동은 유럽을 넘어 중국으로까지 번졌다. 자신을 예수의 동생이라고 믿었던 홍수전이란 인물이 태평천국을 세웠다. 이 유토피아 공동체와 청나라 정부의 충돌로 무려 2000만명이 죽었다.

근대에 들어와 종교 자체는 쇠퇴했지만 종말론은 더욱 호전적으로 변해 칼춤을 추게 됐다고 존 그레이는 생각한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피로 물들인 자코뱅당이나 대학살극을 벌인 독일의 나치, 공포정치를 편 과거의 소련과 중국의 공산당을 모두 종말론 신도라고 본다. 전통 종교를 혐오하든 말든 그들은 분명 광신도들이다. 그들은 인간 삶의 모든 어두운 면을 싹 다 뜯어고쳐 과거에 저지른 어리석은 범죄와 행동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초기 기독교도의 신념을 세속적으로 부활시켰다는 의미에서 그는 이런 체제들을 정치 종교라고 부른다. 그가 보기에 볼셰비키와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나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다른 나라를 공격한 일은, 이란의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신권정치를 내세우며 일으킨 반란과 다를 바 없다. 낡은 체제를 단두대로 보내느라 미쳐갔던 자코뱅당, 사악하고 열등한 민족을 박멸해 세상을 정화해야 한다고 믿었던 나치,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는 망상에 빠진 미국까지 모두 종교적 구원의 약속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최태민 행패는 김재규가 말렸지만 최순실은?

존 그레이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도 기독교 종말론의 폭격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저술에는 볼셰비키에게서 가져온 사고들이 가득하다. 부패한 이슬람 체제를 전복하고 형식적인 권력 구조가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헌신하자는 구호는 이슬람 신학보다는 천년왕국론과 레닌의 혁명론에 훨씬 가깝다. 이슬람 지하드의 주요 목표는 기독교 타도가 아니라 이슬람 내부의 불신자 정부를 전복하는 것이다. 우습게도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함으로써 시리아와 이라크에 설립된 세속 정권인 바스당을 무너뜨리려는 원리주의자들의 염원은 이루어졌다.

한반도를 들여다보는 데도 그의 이론은 유용하다. 북쪽이야말로 정치 종교의 전형이다. 지상에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성대국·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는 목표 아래 권력은 국민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반대자를 가차 없이 살해하고 노예화까지 한다는 점에서 소련의 볼셰비키나 문화혁명 시절의 중국 공산당과 다름이 없다. 굳이 김일성 일가가 목사 집안이었다는 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저 체제는 공산주의보다는 순복음주의 종교 집단에 훨씬 가깝다. 역사상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정치 종교를 우리는 상대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박정희 군부와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정치 종교에 가까웠다. 조국의 근대화·경제대국 건설을 명분으로 국민을 살해하고 억압했다. 국민은 이 시절 정신 차리지 않으면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언제 끔찍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종말론에 내내 시달렸다. 남의 나라를 한 번도 침략한 일이 없다는 백의민족이 베트남 파병을 감행했고 그 호전성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정치 종교의 상투 구호이다.

생각의 뿌리가 같아서였을까. 지금 미국을 움직이는 복음주의 교회의 후예라 할 수 있는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아낌없이 이 군부 독재를 지원하고 보호했다. 개신교의 한 페이지에는 군부를 견제하고 민주 인사들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이 기록돼 있지만 다른 페이지에는 차마 들추기도 민망한 추악한 아부와 유착의 흔적이 가득하다. 1961년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맨 먼저 개신교 지도자들이 미국 정부를 안심시키기 위한 사절단이 되었다. 그들은 군부를 지원해 친일 면죄부와 포교를 위한 특혜를 받고, 군부는 그들을 이용해 정통성 부족을 가리고자 했다. 미국의 조찬기도회를 모방한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열어 정경유착의 고속도로를 뚫었다. 정부는 전군을 대상으로 한 포교를 허용했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초청한 대형 부흥회 등을 국비로 지원했다. 개신교는 정부의 가장 앓던 이였던 산업선교회와 여공들의 고리를 용공 공세로 끊어내어 보답했다. 베트남 전쟁 때는 근대국가로서는 최초로 임마뉴엘 부대라는 개신교인 중대를 편성해 파병하기도 했다. 정부는 정보부 안에 종교과를 두고 종교계와 허심탄회하게 ‘교류’했다.

그런데 종교계의 친정부 활동을 몸을 던져 지원하던 중앙정보부로서도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일이 있었다. 최태민 목사가 총재,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았던, 1975년 4월께 설립된 대한구국선교단이라는 단체 때문이었다. 이들은 군사조직이 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5월31일 제작된 〈대한뉴스〉 제1033호에 따르면 이 단체에 소속된 목사 100여 명이 서부전선 군부대에서 사흘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고 대통령의 딸이 직접 찾아가 치사했다. 이들은 6월21일 배재고등학교에서 구국십자군 창군식까지 가졌다. 이 소식도 〈대한뉴스〉 제1037호가 상세히 전했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 구국십자군은 신자 20만명으로 편성할 계획이었다. 목사가 분대장을 맡고 소년대·중등대·고등대·청년대·부녀대를 조직해 유사시에 대비한 군사훈련을 철저히 받을 예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딸 박근혜를 등에 업은 최태민의 행패를 보다 못해 직보했다가 대통령이 똑바로 처신하지 못하는 걸 보고 거사를 결심했다고 군사법정에서 증언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다. 존 그레이에 따르면 어떤 사회가 선교사적 체제로 변모하고 그 선교사들이 무장을 하려고 덤벼들 때 그 사회의 모든 게 위험해진다.

지금 정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최순실이라는 인물은 최태민 목사의 다섯 번째 딸이자 바로 그 구국선교단 출신이다. 십자군이 창군됐을 때는 아마도, 반공단체들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갖은 폭력을 당하던 여공들과 같은 또래였을 것이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을 벌였던 최씨 집안 떨거지들 이름을 지금도 듣는다는 게 수치스럽다. 아버지는 종말론을 이용했는데 딸은 휘둘린다는 건가. 그 아버지에, 그보다도 못한 그 딸이다.

참고한 활자:〈추악한 동맹〉(이후 펴냄), 〈산업선교, 그리고 70년대 노동운동〉(선인 펴냄), 〈마음의 탄생〉(크레센도 펴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시사IN북 펴냄), 〈경향신문〉, 〈동아일보〉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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