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11월8일 대선 자체보다 그 후폭풍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연일 “선거 조작이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물증도 제시하지 않은 선동이지만 그의 골수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양당 지도부는 물론 각 주 선거 책임자들도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대선 막판에 불쑥 튀어나온 트럼프의 선거조작론에 대해 공화당 지도부마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러닝메이트인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는 “대선 결과를 전적으로 수용할 것이다”라고 공언했고, 공화당 폴 라이언 하원의장도 “이번 대선이 공정하게 치러질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대표적 경합 주인 오하이오 주 국무장관 존 허스테드(공화당)는 “어느 후보건 아무런 증거 없이 선거의 공정성을 의문시하는 무책임한 언동을 일삼으면 잘못이다”라며 트럼프를 비난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번 대선을 끝까지 ‘선거 조작’이라는 프레임으로 몰고 갈 태세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서 계속 선거조작론을 지피면서 유세 지역을 돌 때마다 “선거 조작 때문에 이번 대선을 도난당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퍼뜨리고 있다. 그는 10월18일 경합 주인 콜로라도 유세에서도 “필라델피아·시카고·세인트루이스 같은 도시를 봐라. 거기서 벌어지는 유권자 사기가 끔찍할 정도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권자 사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선거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언급한 문제의 도시들에 대거 거주하는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 인종 유권자들의 복수 투표 혹은 대리투표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본다.

ⓒAFP10월19일 대선 제3차 TV 토론에서 트럼프 후보는 선거 결과에 불복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주장하는 선거 조작은 가능하지 않다. 투표 결과를 바꾸려면 투·개표소에 나가 있는 주정부 선거 담당 관리들, 공화·민주 양당 참관인뿐 아니라 현장 자원봉사자들의 눈까지 한꺼번에 속여야 한다. 선거 부정을 적발하기 위해 양당이 동원한 수백명의 변호사들도 매수하거나, 이들이 눈을 감아야 한다. 저스틴 레빗 로욜라 법대 교수가 2000~ 2014년에 치른 각종 선거에서 투표한 10억 건을 조사한 결과, 문제가 된 투표 건수는 불과 31건(대리 투표)이었다. 또 리처드 하센 캘리포니아 법대 교수는 BBC 방송과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주장하듯 수천, 수만명의 유권자들이 들키지 않고 5번, 10번 혹은 15번을 대리투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소수 인종계 투표 포기 유도하려는 꼼수

그런데도 트럼프가 황당한 주장을 펴는 까닭은 무엇일까? 현재 그가 처한 극도의 정치적 난관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꼼수라는 분석이 많다. 트럼프는 〈워싱턴 포스트〉가 그의 성추행 논란을 처음 보도한 10월7일 이후 본격적으로 선거조작론을 들고나왔다. 이후 트럼프에게 성추행당했다는 여성들의 증언이 잇따라 보도되면서 선거조작론을 더 자주 언급했다. 트럼프는 10월16일 트위터에 “이번 대선은 사기꾼 클린턴을 미는 부정직하고 왜곡된 언론에서는 물론이고 여러 투표소에서 조작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모든 언론이 클린턴과 한통속이 돼 선거 분위기를 조작하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꺼내들었다. 10월21일 현재 37개 주에서 시작된 조기 투표소에서도 “뭔가 조작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했다. 물론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일부 정치 분석가들은 선거조작론의 또 다른 동기를 ‘소수 인종계 유권자에 대한 협박 전술’로 해석한다. 트럼프는 골수 지지자들에게 “일선 투표소에 나가 부정행위를 철저히 감시하라”고 부추겼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투표장 안팎을 둘러싸고 흑인과 히스패닉계 시민들에게 신분증 제시 등을 요구하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면, 상당수 소수 인종계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공화당 측 선거법 전문가인 크리스 애슈비 변호사는 “트럼프가 자신의 지지자들한테 투표 감시원으로 나가도록 부추김으로써 혼란을 조성하고 있다. 이런 혼란이 전체 투표소로 확대될 경우 대선 자체가 불안정해질 수도 있다”라고 경고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선거운동본부 측은 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 등 경합 지역에서 트럼프 측 지지자들의 유권자 협박 행위 등을 감시하고 적발하기 위해 변호사 수백명을 모았다. 이 변호사들은 투표 현장에서 유권자들을 돕는 한편 협박 사례를 보고하거나 법원과 경찰의 보호 등을 요청하게 된다.

ⓒReuters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유세에서 트럼프에게 환호하는 공화당 지지자들.
문제는 트럼프의 황당한 주장이 일부 유권자들 사이에 공감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가 10월17일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 성향 유권자들 가운데 무려 73%가 트럼프 주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전체 유권자 가운데 41%는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선거 조작 등으로 표를 “도난당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민주당 측이 우려하는 점도 바로 선거조작론에 대한 유권자들의 공감이다. 트럼프가 대선 이후 클린턴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은 채 계속 집회를 열어 선거 조작을 주장하고 열성 지지자들이 불복종 운동에 나설 경우 정국이 유례없는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트럼프는 아예 선거 결과에 불복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10월19일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 네바다 주립대학에서 열린 제3차 TV 토론에서 대선 결과 승복 여부를 묻는 말에 “그때 가서 말하겠다. (끝까지) 애를 태우겠다”라고 답했다.

대통령 선거 이후의 정치적 파국을 차단하려면, 공화당 지도부가 결자해지할 수밖에 없다. 즉, 라이언 하원의장과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 라인스 프리버스 전국위원회 위원장 등 지도부가 트럼프의 패배를 인정하고, 신속하게 클린턴 승리의 정당성을 선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희대의 ‘정치 괴물’ 트럼프가 꺼내든 선거조작론에 미국은 대선 이후 정국을 더 걱정하게 생겼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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