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회고록 파문을 보며 새삼 놀란 게 있다. 북한인권결의안을 논의하기 위한 첫 안보정책조정회의가 열린 시점은 2007년 11월15일이다. 바로 40여 일 전 10·4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그 합의 사항을 구체화하기 위해 남북 협의가 봇물 터지듯 이어진 시기다. 이튿날인 11월16일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영일 총리의 오찬 면담도 있었다.

ⓒ시사IN 양한모

이 중차대한 시기에 송 장관은 왜 그토록 북한인권결의안에 매달린 것일까? ‘인권의 보편적 원칙’과 ‘국가정책의 일관성 유지’를 회고록에서 거론했는데, 설득력이 약하다. 2006년 인권 결의에 찬성한 것은 핵실험에 따른 징벌적 성격이 강했다. 그전에는 모두 기권이었다. 인권이 보편적 가치인 것은 사실이지만 유엔 결의에 찬성한다고 북한 인권 상황이 개선되나? 오히려 10·4 합의로 조성된 남북 화해라는 국익을 훼손할 뿐이다.

과거 서독은 미국의 인권 외교가 동서 화해라는 국익을 침해하면 맞서 싸웠다. 더구나 10·4 합의 하루 전 체결된 10·3 합의는 북한 비핵화와 관련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런 중차대한 때에 유엔이 인권 결의를 앞세워 북한을 압박하는 것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야 할 외무부 장관이 오히려 유엔 편에 서서 홀로 고집을 부렸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송민순 장관의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 11월15일 회의에서 기권하자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는데도 혼자 계속 버티자 11월16일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회의를 주재해 기권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승복을 못하고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11월18일 문제의 서별관회의로까지 이어진다.

회고록을 살펴보면, 여기서 문제가 된 북한 의사 타진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바로 송 장관이었다. 즉 송 장관이 유엔에서 남북 외교관 간에 사전 접촉을 한 내용을 설명한 끝에 이 얘기가 나온 것이다. 사전 접촉의 부당성을 따지려면 본인 휘하 외교부의 접촉부터 따져야 할 상황이다. 그럼에도 10년이나 지나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이 사안을 다시 끄집어낸 이유가 뭘까? 이미 죽은 시체나 다름없는 남북관계에서 아직도 파먹을 게 남았단 말인가.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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